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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잊혀서는 안 될 이름

입력 2022-12-01 03:10:01


어느 한 저명한 랍비가 타지로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그가 들어간 객실에는 몇몇 상인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모습의 랍비를 알아보지 못했고, 흥이 더하자 초연하게 앉아있는 랍비가 괜히 신경 쓰였다. 그들은 랍비보고 놀이에 끼지 않으려면 객실에서 나가라고 했고, 결국 그중 하나는 멱살을 잡고 랍비를 쫓아냈다.

한 마을에 이르러 한 무리의 사람이 기차에서 내렸다. 거기에는 랍비와 상인도 포함됐다. 마을 사람들은 랍비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드렸다. 그제야 상인은 자기가 크게 실수한 것을 알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랍비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가 거듭 찾아가 사죄했지만 랍비는 그를 외면했다. 마을 사람마저 평소 자비롭던 랍비의 차가운 태도를 이상하게 여겼다. 불안해진 상인은 랍비의 큰아들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했다.

랍비의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세 번 사죄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유대교의 원칙을 슬그머니 언급했다. 랍비는 그 원칙이 맞더라도 자신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때 상인은 랍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무시해도 괜찮을 그저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고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그가 범죄를 가한 대상은 유명한 랍비가 아니라 ‘이름 없는 누군가’였던 셈이다. 달리 말하면 랍비 자신이 아니라 이름 없는 누군가가 상인의 사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국의 유대교 학자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용서가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피해자를 대신해 용서할 수 없다는 교훈을 끌어낸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접하며 개인의 이름과 인격의 고유함에 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이름이 한 사람에게 부여되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기에 우리는 그를 인격으로 대하게 된다. 하지만 이름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때 익명의 ‘누군가’가 우리 앞에 선다. 그만의 고유함도 개성도 사람됨도 경험할 수 없게 되면 그는 역사에 등장했다 사라진 수많은 이름 없는 이 중 하나로 전락한다.

이름이 없어진 대상은 우리가 인격을 대할 때 느끼는 인간으로서 공감이라든가 도덕적 의무감을 쉽게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름 없는 누군가는 우리 앞에 서 있을 때조차 우리에게 타자로서 저항감을 불러내지 못한다. 이름이 상대를 인격으로 대하는 데 필요한 그 무엇이기에, 이름을 잊거나 부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은 큰 위협을 받게 된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여러 일이 일어났지만 그중 무엇보다도 희생자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정부가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차린 합동분향소에 이름 없는 위패가 놓인 이래, 희생자의 이름을 놓고 다른 입장을 가진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다. 유가족 동의 없이 이름을 공개한 언론이 있는가 하면 이를 기회로 상대 당을 공격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정치 논리가 이름을 희생자로부터 떼어놓고 도구화하는 동안 유가족은 세상을 먼저 떠난 자녀의 이름을 힘겹게 떠올리며 사망자 신고를 하고, 청약통장을 해지하고 자취방을 정리하고 자녀의 친구 연락을 대신 받았다.

여야가 국정조사에 합의했다는 소식 뒤로 곧 파열음이 날카롭게 들려온다. 정치에 신물이 나 더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반면 더 맹목적으로 정치적 내 편을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 또한 책임감 있고 현명한 정치적 판단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부디 희생자의 이름이 그들의 안타깝도록 짧았던, 하지만 무엇으로도 형언 못 할 고유하고 소중한 삶을 기억하고 애도하게 해줄 본래 역할을 속히 회복하기를 바란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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