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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신앙의 언어가 공허해질 때

입력 2022-11-03 03:05:01


토요일 저녁, 주보는 이미 인쇄됐다. 성경 본문은 정해졌고 거기에 맞춰 설교문도 작성했다. 찬양대는 예배 때 부를 곡을 연습했다. 505년 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일으킨 개혁을 기념하려다 보니 모두가 준비에 더 공을 들였다. 약 3년 만에 포스트코로나 시대로 진입한 만큼 세상을 향해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새롭게 보여줄 때였다.

예기치 못하게 밤 10시쯤 이태원에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축제를 즐기러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가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뒤엉키면서 우르르 넘어졌다. 150여명이 목숨을 잃고 그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 사상자 수가 전례 없이 많은 데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몹시 충격적이다.

다음 날 압사 사고 속보를 계속 듣다가 시간이 되어 종교개혁주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시작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이 울렸다. 기도와 설교 중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유가족에 대한 위로가 간략히 있었지만, 이미 예배 전체가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한 신앙의 위대함에 맞춰져 있었다. 예배 내내 분노와 슬픔과 우울의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송영과 결단의 기도는 마음속까지 와닿지 못한 채 귓가를 스치고 곧 사라졌다. 신앙의 언어가 이처럼 무력하고 무의미해지는 경험은 세월호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듣고 있는 사람도 이처럼 공허한데, 그날 그 자리에서 회중을 대표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했던 이들은 어떠했을까. 피해자와 희생자의 가족과 친지, 친구들의 마음은 묘사나 가늠이 가능할까.

평온한 일상에서 잘 작동하던 언어와 매끈한 논리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균열이 생기고 삐꺽거리게 된다. 언어가 무의미의 굴레에 빠져 오작동함에도 뭔가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말은 원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피해자와 희생자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더할 수도 있다.

신앙의 언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신학적으로 옳아 보이는 말일지라도 피해자와 희생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나온다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 아니라 슬픔으로 생채기 난 이들의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하는 소금이 된다. 물론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고귀한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선포의 사명을 ‘막말 면허’처럼 생각하는 일부 목회자나 성도가 있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혼란과 두려움에 압도될 만한 상황에서 신앙은 우리가 말없이 인내하며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성서에 따르면 침묵은 언어가 공허해지는 무의미의 순간 하나님께서 고통의 자리에 현존하시는 중요한 방식이다. 하지만, 호기심과 해석에 중독된 인간은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하기에 하나님을 앞질러 자신이 고발자와 심판자가 되려 한다. 일례로 욥의 친구들은 본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현실의 무의미를 현학적인 신학으로 채워 넣고자 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종종 빠졌던 유혹이기도 하다.

지금도 유가족은 끔찍한 비통함에 빠져 있다. 병원에서 생사를 오가며 고통과 싸우는 생존자도 있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환자를 나르던 의인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태원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허우적대는 이들도 있다. 참사를 매체로 접한 수많은 사람이 분노와 우울과 무기력을 수시로 경험하는 중이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한 마음과 위로가 전달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때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고민하고 준비했던 한국교회이지만,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데 있다는 본질적 가르침을 되뇌는 중이다. 함께 슬퍼해야 할 슬픔이 유한한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이 크기에 마음이 몹시 아린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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