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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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불안 문화

입력 2022-10-28 04:05:01


어린 시절 유명했던 프랑스 배우 소피 마르소를 누군가 언급하면 꼭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한 친구가 프랑스에 가서 당대의 미인으로 인기 절정이었던 소피 마르소와 이야기를 나눌 거라며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며 웃었지만 친구는 진지했다. 그러나 당시 고등학교에선 다른 이유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가 더 흔했는데, 바로 시험이 끝나면 정기행사처럼 벌어지는 매타작 때문이었다. 지난번보다 시험을 못 쳐서, 평균보다 점수가 낮아서 등등으로 한 반에 절반도 넘는 학생이 매를 맞았다.

학교의 매타작이야 없어진 지 오래지만 오늘날도 많은 아이가 무서워서 공부를 한다. 배움을 통해 얻을 성취가 아니라 공부를 못하면 망한다는 불안이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어디 학생뿐이랴. 직장인은 승진을 못할까 봐 열심히 일하고, 노후가 불안해서 저축과 투자를 하며, 교수는 임용 연장이 안 될까 봐 논문을 쓴다. 리더가 돼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싶어서, 노후에 즐겁게 여행을 하고 싶어서, 연구가 보람차서 노력한다 할 수도 있는데 굳이 그것을 부정의 언어, 불안의 언어로 번역해 버리는 서글픈 현실이다.

물론 바람보다는 불안이 자아내는 에너지가 더 폭발적이고 크다. 소피 마르소는 프랑스에 살지만 선생님의 매는 바로 옆에 있다. 평화에 대한 열망이야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며 아이에게 최대한의 불안을 심어주려 노력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문제는 그렇게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안으로 얻은 성공은 늘 빼앗기면 안 되는 성공이다. 성공과 행복이 목적인데, 그걸 굳이 망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니 불행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매타작이 사라진 바로 그 기간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함께 늘어났다.

불안의 감정이 혐오와 미움으로 이어지는 것도 큰 문제다. 불안하면 사람은 모든 관심을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경계하거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 편을 가르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며 대화보다는 갈등 상황을 오히려 선호하게 된다. 뚜렷한 적이 있으면 불안의 대상이 분명해져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이리저리 갈라지는 희망과 기회보다 전선이 분명해지는 위기를 조장하곤 한다.

불안을 에너지로 삼게 되면 불안을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불안할 이유를 찾는 병리적인 상태로 이어진다. 2등을 하면 1등이 아니라서 불안하고, 1등을 해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 바로 나락에 떨어질 것이라 애써 생각한다. 불안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극한 경쟁이 당연한 것이 되고 삶은 그저 살벌한 것이 되고 만다. 이쯤 되면 아예 ‘불안 문화’라고 이름을 붙여도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대립과 반목, 결과가 좋다면 과정의 정당성은 무시해도 좋다는 생각, 승자 독식, 기계적 공정에 대한 갈망도 모두 불안 문화에서 시작된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일정한 불안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상사 모두를 불안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그것을 탐닉하고 조장할 이유는 없다.

이 지점에 기독 교회의 사명이 있다.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불안 문화의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불안 문화가 확산하는 동안 제대로 막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불안과 거기서 파생하는 혐오, 폭력, 경쟁, 갈등, 부패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매맞는 장면이 아니라 소피 마르소를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

손화철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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