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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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모시는 삶 얼마나 좋은지 안내하는 ‘재소자들의 길잡이’

입력 2022-03-07 03:10:02
‘전과 6범 목사’로 불리는 문병천 목사가 최근 서울 은평구 자택 인근 불광천 변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 목사는 “돌이켜 보면 내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하나님은 언제나 내 인생에서 위기를 기회로 인도하셨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전북 정읍교도소에서 재소자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 문 목사 제공
 
1995년 2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문병천 목사가 딸 혜림이를 안고 동기 곽호철 목사와 함께했다. 문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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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6범 목사. 세상이 문병천(73) 목사를 부르는 방식이다. 1972년 3월 7일 처음 교도소에 들어가 1990년 2월 초 마지막으로 출소했다. 절도 등의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서 15년 8개월을 보냈고 그 사이 사회생활은 고작 4년 4개월밖에 못했다. 교도소 내 불합리한 규정과 관행에 맞서다 '문제수'로 찍혀 인생에 대해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었다. 그러다 어느 날 공부만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온몸을 던져 공부했다.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만나 연세대 신학과를 거쳐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목회의 길로 들어서 재소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기적처럼 다가온 하나님

문 목사가 1986년 청송교도소(현 경북북부제1교도소)에서 검정고시 합격 후 학력고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재소자 신분으로 교도소 철문 밖에 나가 학력고사를 치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막막한 상태였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왕래하던 아버지의 편지가 생명을 지탱해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아버지 편지에 의지해 교도소 컴컴한 방 안에서 학력고사 준비에만 몰두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편지가 끊겼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어 모든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교도소 청소를 담당하는 재소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민을 얘기했더니 그는 “우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응답으로 주셨다”면서 “함께 금식기도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문 목사는 “그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청송교도소 안에서 재소자 기독교회장을 맡은 사람이었다”면서 “나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준 사자였다”고 회상했다.

문 목사는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해보기로 했다. 교도소에서 일부러 굶는 것은 징벌 대상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 재소자가 식사 배급 담당도 겸하고 있어서 금식 사실을 숨겨 징벌은 피할 수 있었다. 문 목사는 공부는 잠시 제쳐놓고 “정말 이번만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제가 출소하면 반드시 주의 종이 되어 이곳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기도했다.

일주일 금식기도가 끝나고 사흘이 지나자 기적처럼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동안 편지가 끊긴 이유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일은 어머니가 의식이 돌아오고 회복하신 날이 바로 문 목사가 금식 기도를 시작한 날과 일치했던 것이다. 문 목사는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놀라운 일은 또 일어났다. 원래 어머니는 차멀미가 심해서 고향 전북 임실에서 전주까지 버스를 타고 가다 쓰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중풍에서 회복하신 후 어머니는 임실에서 경북 청송까지 버스를 타고 면회를 오셨다. 그리고 문 목사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병천아, 하나님을 믿어라. 엄마 부탁이다”였다.

어머니가 쓰러진 후 고향 임실교회 성도들이 자주 방문해서 보살피고 “아들이 교도소에서 새사람이 돼 나올 것”이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반감이 강했던 어머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문 목사는 어머니 면회 후 세례를 받기 위해 정식으로 교리학습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문 목사는 “나같은 전과자도 새롭게 새 출발을 할 수 있고, 누구 못지않게 올바른 사회인으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영접하고도 늘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불쌍한 저를 버리지 마시고 제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는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늘 다시 시작하게 해주시는 분”이라며 “저같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분인데 그 누구든 하나님은 사랑으로 품어 주신다”고 강조했다.
 
말씀에서 얻은 긍정의 신앙

교도소 재소자에서 목회자가 되기까지 그를 버티게 했던 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교도소에 들어온 후 읽을 수 있는 책은 성경밖에 없었다. 그때 성경은 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앙을 갖게 된 후 성경은 온전히 하나님 말씀으로 다가왔다. 문 목사가 평생 간직하는 말씀은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나오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 이야기다. 이 말씀을 통해 그는 긍정의 신앙을 갖게 됐다. 문 목사는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지만 베드로만은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면서 “긍정적인 사고로 일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실 처음 긍정의 힘을 깨닫게 했던 계기는 1983년 대전교도소에서 한 크리스천 대학생과의 만남이었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인생을 바꿔보겠다며 무작정 공부하겠다고 맘을 먹었을 때였다. 독방에서 성경을 읽고 영어 공부만 했다. 그때 긴급조치 위반으로 교도소에 들어와 교류하던 대학생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도 공상에 그친다”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문 목사는 출소할 때마다 바르게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교도소에 들어오는 자신을 되돌아봤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 대학생은 “검정고시반에 들어가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계획을 짜라”고 했다. 첫 반응은 “나 같은 교도소 사고뭉치가 검정고시반에 들어갈 수 있느냐”였다. 대학생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되는 쪽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가 물 위를 걷는 예수님 이야기였다. 그 학생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후에야 굳건한 신앙으로 섰다”면서 “실패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문 목사는 이렇게 깨달은 긍정의 힘으로 안 될 것 같던 검정고시반에 들어갔고, 학력고사까지 볼 수 있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교도소 독방에서 검정고시와 학력고사 공부를 할 때, 또 유혹이 찾아올 때면 언제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10-11)는 말씀을 되뇌며 이겨냈다.
 
내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송교도소 출소 전 서울대에 응시해 실패했던 문 목사는 출소 후엔 연세대에 도전했다. 1991년 입학한 곳은 1지망 사회복지학과가 아닌 2지망으로 쓴 신학과였다. 문 목사는 목회자의 꿈을 품고 있었지만 우선 사회 전반을 공부한 뒤 신대원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신학과였다. 문 목사는 “모두 신앙이 있는 친구들이어서 동기생들은 편견 없이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면서 “아마 다른 과였다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뒤 온누리교회 새사람선교회를 통해 소망하던 교정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문 목사는 “재소자들은 출소할 때마다 교도소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시 돌아오곤 한다”면서 “그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돼 자신이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현재 문 목사는 1978년 목포 교도소에서 인연을 맺은 장영달 전 의원(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복역 중)을 비롯해 전주 효자동교회 백남운 원로목사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교정선교 단체 요셉선교회의 대표를 맡고 있다.

최근 서울 은평구 자택 인근에서 만난 문 목사는 “돌이켜 보면 내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하나님은 언제나 내 인생에서 위기를 기회로 인도하셨다”고 말했다.

“살다 보면 때때로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고 그분의 뜻이 의심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교도소에서, 그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저에게 최선의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맹경환 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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