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길을 걷다 아이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듣는다. 우산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경쾌한 목소리다. “엄마, 지금 오는 비는 여름비야, 가을비야?” 질문을 들은 엄마의 우산이 앞뒤로 펄럭인다. 아마도 아이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을 것이다. 여름비와 가을비란 단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름비라고 생각했다. 비에도 특유의 냄새가 있는데, 오늘의 냄새는 확실히 여름에 가까웠다. 엄마의 대답은 명쾌했다. “오늘이 처서(處暑)니까 가을비겠지?”
처서는 이십사절기 중 첫가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때다. ‘물씬’까지는 아니고 ‘슬슬’ 정도가 적당할 듯싶다. 아침저녁에 부는 선선한 바람은 비로소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입추(立秋) 다음에 찾아오지만, 입추 때만 하더라도 가을이 요원하게 느껴진다. 더위가 한풀 꺾이기를 바라는 게 입추라면, 더위가 가신 걸 심신으로 감지하는 게 처서인 셈이다. 모기가 들어가고 귀뚜라미가 나오는 때이니 밤을 수놓는 울음소리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설이 있으나, 북한에는 “처서 밑에는 까마귀 대가리가 벗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북한의 속담은 처서 무렵에 찾아오는 마지막 더위가 까마귀의 대가리가 타서 벗겨질 만큼 매우 심하다는 걸 비유한 말이다. 이 시기는 으레 무더위에 한바탕 시달리고 난 이후다. 마지막 더위의 길이와 세기에 따라 모기 입과 까마귀 대가리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처서 무렵의 날씨가 한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결정짓는다는 얘기도 있다. 초가을의 풍요로운 햇살에 벼 이삭이 패는 시기이므로, 처서에 내리는 비가 농민에게 달가울 리 없다. 햇볕에 고추를 말릴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농민의 이야기도 들린다. 날씨가 생활의 불편을 야기하는 삶과 그것이 생계에 영향을 끼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비가 와서 기쁠 때 누군가는 비 때문에 슬플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는 건 여기지만, 빗소리는 여기 너머를 헤아리게 만든다.
익은 것들이 무르익는 계절, 태풍에 이은 가을장마 소식에 마음이 무겁지만 별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조심조심 걸었다. 지구가 병들기 시작한 후로 계절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자연에 사람의 힘을 더하고, 그것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면서 진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냥 둬야 하는 것, 저절로 흘러갈 수 있게 지켜줘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봄가을이 짧아지는 데는, 그리고 예상치 못한 감염병이 창궐하는 데는 인간의 책임이 크다. 처서에 찾아오는 무더위와 장마가 자연 현상이라면 전 지구적으로 상승하는 기온과 해수면 높이는 인위의 결과다.
가을은 으레 한 해의 세 번째 철로 인식되지만, 가을의 다른 뜻도 있다.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임. 또는 그런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가을하다’라는 동사로 활용되기도 한다. 말 그대로 가을에 가을하는 셈이다. 익은 것을 수확하는 계절답게 가을에서 파생한 단어도 참 많다. “가을철에 입는 옷이나 쓰는 물건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가리켜 ‘가을것’이라고 한다. 물론 봄것, 여름것, 겨울것이라는 단어도 있다. 늦가을을 가리켜 ‘서릿가을’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다음 해의 농사에 대비하여, 가을에 논밭을 미리 갈아 두는 일”을 ‘가을갈이’라고 부른다. 가을은 수확하면서 대비하는 계절인 셈이다.
얼마 전 “가을에는 손톱 발톱이 다 먹는다”라는 속담을 알게 됐다. 가을에는 손톱이나 발톱까지도 먹을 것을 찾는다는 의미로, 가을철에 당기는 입맛을 표현한 것이다. 천고마비라고 하지만, 익어가는 것들 때문에 인간의 식욕 또한 왕성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을 식은 밥이 봄 양식이다”라는 속담도 있다. 가을에는 먹을 것이 흔하지만, 이른 봄에는 그것이 귀중한 양식이 될 터이니 뒷날을 위해 절약하라는 말이다. 당장의 탐욕을 경계하라는 가을의 가르침이다.
밤에 밖에 나와 비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금도 여름것은 가을것이 되기 위해 부단히 무르익고 있을 것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며칠 전과는 다른 냄새와 질감이 느껴진다. 오전에 만난 아이 엄마의 말처럼, 오늘 내리는 비는 가을비다. 슬그머니 찾아왔다가 한눈파는 사이에 사방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비다. 가을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이, 가을이 왔다.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