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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3) 열다섯 나이에 주점 취직… 장학생에 뽑혀 학업 이어가

입력 2021-06-10 03:10:01
이장식 교수의 모교회인 진해 경화교회. 가운데 한복 차림의 강상은 목사가 서 있다.


보통학교 졸업 동기생 120명 중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단 셋뿐이었다. 나는 진해 일본해군공작소에 취직 시험을 치렀다. 학과 시험은 통과했으나 색약이 발견되면서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어머니의 실망이 크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연하셨다. 어머닌 행상을 하며 알게 된 일본인 주점에 나를 소개해 취직시켰다. 내 나이 겨우 15세였다.

이 시절 일본인 상점주인들 중에는 조선인 점원들을 학대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내가 만난 주인은 그러진 않았다. 다만 일은 고됐다. 주점에서 얼마 동안은 술병 씻는 일, 청소하는 일, 그리고 주인집 아이를 봐주는 정도의 일을 했다. 취직한 지 4~5개월 후엔 집집을 다니면서 새 고객을 구하는 일과 술 배달, 신문 배달 일도 했다. 집에는 한 달에 하룻밤만 갈 수 있었다. 주일날 교회 가는 일은 꿈도 못 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교회인 경화교회 강상은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내게 세례를 주신 강 목사님은 1938년 조선장로회 총회가 일본 신사에 참배할 것을 결의했을 때 목사직을 사임하고 은거하실 만큼 믿음의 강단이 있는 분이었다. 강 목사님은 내게 당시 경남 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호주장로교선교부 장학생에 지원하라고 했다.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 두 달 전에 주점 주인에게 양해를 얻고 집으로 돌아와 수험준비를 시작했다. 호주장로교선교부는 경남의 여러 교회에서 온 장학 지원생들 대상으로 먼저 선발 시험을 치렀다. 나는 이 시험을 거쳐서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를 비롯해 4명의 장학생이 선발됐다. 우리가 이 장학제도의 마지막 수혜자였다.

내가 이 마지막 열차를 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별수 없이 주점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강 목사님의 연락이 없었더라면 난 장학금 제도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믿음이 내 신앙의 초석이었다면, 강 목사님은 그 믿음을 살려서 키워갈 수 있는 길을 찾아주신 분이었다.

계성중학교는 기독교 학교로 영남 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지역에서 붉은 벽돌로 건축된 최초의 학교이기도 했다. 이곳 강당 건물 정면 처마 아래에는 한문으로 잠언 1장 7절 말씀(寅畏上帝 智之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이 쓰여 있었다. 이 성구는 내가 주일학교 시절 암송했던 많은 성구 중 하나였다. 즐겨 외우던 말씀이 교훈인 학교에 입학하게 되다니. 실로 하나님의 큰 섭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시절 조선의 모든 학교 교실에선 일본말을 써야 했다. 교정에서도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되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졸업할 때까지 우리말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계성중학교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우리말로 예배를 드렸고 교정에서도 마음껏 우리말을 사용하도록 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데다 교장 역시 해럴드 헨더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였기 때문에 일본 당국에서도 우리 학교의 이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용인한 것 같다.

듣기론 헨더슨 교장이 미국으로 쫓겨난 뒤에 후임으로 조선인 교장이 들어선 때부터 학교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다고 한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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