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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박종석 (4) 사업 실패 후 공부로 목표 변경… 장학생으로 과학원 입학

입력 2021-05-14 03:05:02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1991년 5월 어머니의 기도, 아내의 헌신과 LG전자의 지원으로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은 학위수여식을 끝내고 전기공학과 건물 앞에서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찍은 모습.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나의 목표는 공부로 변경됐다. 그렇다고 마냥 공부만 할 순 없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으니 장남인 나도 경제적 보탬이 돼야 했다. 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산학장학생으로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거였다.

당시 정부는 과학인재 양성을 위해 특별법까지 제정해 과학원을 지원했다. 과학원도 경제와 산업 발전 기여라는 설립 취지에 맞게 국비 장학생과 산업체 출신의 산학장학생 제도를 운영했다. 기숙사를 제공했고 산학장학생에겐 소속 회사에서 월급도 줬다. 병역 특별조치로 현역복무는 10주 이내 군사 교육 소집으로 대체됐다.

1981년 2월 대학 졸업과 함께 지금의 LG전자인 금성사에 무난히 입사했다. 한 달 뒤엔 과학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LG전자 월급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 과학원은 교수도, 학생도 치열하게 공부하던 때였다. “과학원 1년차에 코피 한 번 안 쏟으면 과학원생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공부만 하니 돈 쓸 일은 없었고 교회에 갈 시간도 없었다. 월급봉투는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드렸다. 믿음 좋은 과학원 동기의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2년 뒤 과학원을 졸업한 나는 LG전자로 돌아가 당시 서울 구로구 소재 중앙연구소에서 디지털TV 분야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3년간 근무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지키고 나니 또 다시 공부의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LG전자엔 직원 대상의 유학 지원제도가 생겼다. 일명 국제전문인 양성과정이었다. 미래 LG전자의 국제화를 주도할 인재를 회사에서 키우자는 게 목표였다. 인사고과, 내부평가 등을 통해 선발했고 나는 첫 번째 수혜자였다. 86년 8월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 들어갔다.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타지 생활이 외로울 거란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4개월 뒤 아내와 큰 아들이 미국에 올 때까지 외롭지만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공부도 어렵지 않았다. 과학원에서 워낙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던 터라 미국 대학의 교육은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화와 언어도 점차 적응됐다.

특히 유학생을 위한 기혼자 아파트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인종은 다양했지만 타지에서 가족과 함께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그때 한국에서 온 한 유학생과 그의 가족을 만났다. 그 분은 얼굴부터 ‘믿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얼굴에 나타난다면 그 분의 얼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하게 생겼다. 어느 날 그 분이 나를 포함한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제안했다. 내 입에서 “그러시지요, 형님”이란 답이 튀어 나왔다. 성경공부는 자연스럽게 교회 출석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내는 교회에서 한글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큰 아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 사이 둘째 딸이 태어나는 기쁨도 경험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그때 나는 믿음 생활을 한 게 아니었다. 교회 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91년 5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교회 생활을 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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