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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복음 위해 섬 끝까지 가리다”… 소명, 끝섬에 닿다

입력 2020-10-23 16:35:01
1950~70년대 전북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 11개섬 복음화에 힘쓴 추명순 전도사를 기리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기도의 어머니’로도 불리던 추명순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회자가 된 이들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1980년대 추 전도사가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노둣길을 따라 전도에 나서는 모습이다. 추명순 전도사 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대 초로 추정되는 말도교회 모습.
 
추명순 전도사 (1908~1994)
 
1989년 무렵 말도교회 3대 임봉학 목사와 설립자 추명순.



 
현 말도교회가 있는 마을의 드론 사진. 군산중동교회 서종표 목사 제공
 
말도교회 앞 폐경로당. 추명순 전도사 기념관 예정지다.
 
말도교회. 선원들을 대상으로 와플·커피 빵 전도를 한다.


그날 선주가 말했다.

“군산항에서 이곳 끝섬까지 닿으려면 2박 3일 노 저어 와야 할 때도 있었어요. 돛을 단 풍선이었죠. 그때 섬은 바람만 조금 불어도 발이 묶여요. 물도 부족하죠… 사람 살 데가 못 됐어요. 그런데 전도사님이 여자 몸으로 그 많은 섬을 돌며 아픈 사람, 배 곯는 사람, 못 배운 사람 등을 거둬요. 지금 세상에 그런 분이 있을까요?”

지난 한글날 연휴. 전북 군산 앞바다 새만금 방파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교통 체증을 빚었다. 방파제가 군산~부안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쯤 고군산군도 6개 섬이 방파제로 이어졌다.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이다. 천지개벽한 이곳은 상가와 펜션 등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관광지가 됐다.

그 여섯 개의 관광지 섬 가까이 네 개의 섬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가 있다. 버려진 섬처럼 을씨년스럽다. 밤이면 선유도 등 여섯 개의 섬이 휘황찬란한 LED 전등으로 빛을 발하지만 말도 등 네 개 섬은 인적조차 드물다. 섬마다 분교마저 폐교된 지 오래됐고 노인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경로당 문도 굳게 닫혔다. 그러니 예배당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11개 섬이 군도를 이루는 고군산의 오늘날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군도에만 9곳의 교회가 있다. 명도교회 1곳을 제외하자면 나머지 모두가 성결교회다. 1959년 추명순 전도사가 이 고군산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군도 전체가 복음화됐다. 당시 51세의 전도사가 “섬 끝까지 가리다”며 이곳 끝섬 말도로 들어온 것이다. 추명순은 생전 ‘고군산의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추명순은 충남 보령시 웅천 출신의 유교 집안 무남독녀였다. 그리고 열다섯에 인근 서천으로 시집을 갔다.

“참으로 지옥이었습니다. 남편의 난봉으로 연놈들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했어요. 관상쟁이한테 가니 정화수 떠놓고 새벽마다 기도하래요. 3년을 했어요. 한데 어느날 일가뻘 할머니 한 분이 ‘그런 기도 아무리 해도 쓸데없다. 예수 믿어야 한다’고 하시대요. 십리를 걸어 서천 비인성결교회를 다녔습니다. 원한을 통회하고 자복했어요.”

하지만 그는 산 채로 묻혀야 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였다. 가끔 한 번 집에 들어온 남편이 그를 마구 때리더니 예수 귀신이 씌었다며 목만 내놓게 한 채 땅속에 묻고 가버린 것이다.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땅이 갈라져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교회에 봉사했어요.”

그렇다고 연단이 그치지 않았다. 1943년 일제의 예배당 강제 폐쇄를 거부하고 제단을 지키다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게다가 천금보다 귀한 아들이 병으로 죽었다. 남편 집안에선 그를 쫓아냈다. 그는 비인교회 예배당을 방주 삼아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리고 지방신학교를 나와 전도사가 됐다. 6·25전쟁 후 서천 원두교회, 김제에 교회를 개척했고 충남 안면도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그러던 어느날 군산중동교회 김용은(1918~2009) 목사가 이끄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김 목사는 전쟁 때 자신이 설립한 정읍 두암교회에서 어머니와 아들, 동생 등 친인척 22명이 좌익에 살해당할 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역자였다. 추명순이 그를 찾아갔다. “섬에 가서 개척 전도하겠느냐” 물었다. “복음 전하는 곳이면 섬 끝까지라도 가오리다” 답했다. 끝섬 말도에 그렇게 부임했다.

그렇게 김용은의 섬 선교 지원으로 추명순은 1970년대 중반까지 8개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일으켜 세웠다. 섬사람들은 아이가 죽으면 큰 나무 중간에 달아 풍장을 했고, 산모가 산기가 있으면 용왕님이 피를 싫어한다며 마을 밖에 움집으로 내쫓던 시절이었다. 무녀들의 방해와 협박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있었다. 추명순은 기도를 무기 삼아 노를 저어 섬마다 돌았다. 섬 아이들이 누구보다 그를 반겼다. 군산중동교회 등이 보내오는 성경책과 구호 물품이 많은 사람을 구했다.

“전남 신안에 문준경 전도사님이 계신다면 군산 고군산에는 추명순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섬의 기도하는 어머니셨어요. 당신의 몸이 쇠약해져 교역자 안식처인 대전 성락원에 가실 때까지 24년을 헌신하셨어요. 술과 미신으로 새해를 맞고 풍어제를 지내던 섬사람들은 추 전도사님이 들어오고서 예배로 축복해 달라고 바뀌었어요.”

‘추명순 섬선교 행전’에 동행한 서종표 군산중동교회 목사가 이같이 말했다. 서 목사는 선유도교회 오흥덕 목사 등 고군산의 사역자, 교단 및 한국교회와 함께 ‘추명순 전도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뜻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추명순 주 사역지인 말도의 방치된 경로당 건물을 매입,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1억여원이 모였다. 말도교회는 현재 강원관광대 교수 출신으로 혈액암과 싸우고 있는 김상남 목사와 성도 6~7명이 ‘굳건하게’ 추 전도사의 끝섬 선교의 비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 쇠퇴가 눈에 보이면서 말도 관리도 방축도 등 ‘섬 밖 섬’ 교회는 유지가 쉽지 않다. 올여름 태풍으로 예배당과 사택이 파손되거나 누수로 망가지면서 임시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도 목회자들은 “영적 스승 추 전도사님 헌신에 비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별것 아니다”며 “죽으나 사나 섬 주민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추명순 전도사는 우리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한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고군산열도=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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