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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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전세의 문이 닫히고 있다

입력 2020-08-04 04:05:02


가족과 살 때도, 서울에 와서도, 몇 년의 하숙생활을 제외하고 꽤 오래 전세를 살았다. 혼자 살고부터 전세계약 만료만 다가오면 없던 두통이 생겼다. 외환위기 충격이 한창일 때엔 전세보증금보다 집값이 아래로 떨어질까 걱정했고, 그 파도가 지나자 벼락같이 오르는 전셋값에 시달렸다. 대략 2년에 2000만~3000만원가량 올려달라고 했다. 마이너스통장을 만들고 적금을 부어가며 겨우 버텼다. 그 사이 같은 동네 안에서 이사를 세 번 다녔다.

한겨울 전셋집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알아서 수리할 테니 비용을 달라는 전화를 집주인은 건성으로 받았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보일러는 고쳤지만, 그 돈을 받기까지 여러 번의 실랑이와 전화가 오고갔다. 그래서 늦은 결혼을 하면서 다급하게 처리한 일이 내 집 마련이었다. 집값의 절반이나 대출을 받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전세살이의 불안감이나 고단함에 비할 바 아니었다. 집을 구한다는 건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 부동산시장은 가장 좋은 투자처다. 속된 말로 망해도 깔고 앉아 버티면 된다. 이런 믿음이 시장을 좌지우지한다. 부동산시장은 늘 주식시장(코스피 기준)보다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산이 많은 지형이라 부족한 토지 공급, 덕지덕지 붙은 규제, 자본·인재·교육의 수도권 집중은 믿음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한국은 주택을 보유했을 때 내는 세금도 상대적으로 낮다. 보유세(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실효세율은 0.15%(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에 불과하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보유세 실효세율이 평균 1% 정도다. 가장 낮다는 하와이가 0.27%, 제일 높은 뉴저지는 2.47%다. 이렇다 보니 우리 가계자산에서 부동산 비중은 80% 남짓에 이르고, 전 국민은 부동산 전문가가 됐다.

여기에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전세 제도는 시장의 임대 수요를 떠받친다. 전세는 언제든지 목돈을 되찾을 수 있어 세입자에게 매력적이다. 다만 저금리가 오래 지속되는 상황에서 전세 제도가 유지되긴 쉽지 않다. 전세 제도가 살아 남으려면 금리가 오르거나 집값이 뛰어야 한다. 그래야 집주인은 세를 놓는다. 하지만 금리는 과거의 고금리로 돌아가기 어렵다. 집값이 무한정 오를지도 물음표다. 그나마 전세 공급을 가능하게 만든 건 갭투자(전세 끼고 주택 사들이기)였다.

이제 전세의 문이 닫히려고 한다. 정부와 여당이 ‘임대차 3법’을 속전속결로 처리하자 시장에선 다양한 걱정을 내놓는다. 안도의 목소리에 전세 멸종을 우려하는 한숨이 뒤섞여 있다. 앞으로 2~4년 후 전세 대란, 월세 폭등이 벌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란다. 그래서 아쉬움이 크다. 임대차 3법이 시장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다면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나 부동산 세제 개편을 함께 가져가야 한다.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가 시장의 큰 흐름이 될 때 서민들에게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10평대부터 40평대까지 다양하고 싸고 질 좋은 공공임대주택을 빠르게, 그리고 꾸준하게 공급한다면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주거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임대료 안정도 꾀할 수 있다. 보유세를 높이되 양도소득세를 낮춰 다주택자에게 출구를 만들어준다면 부작용을 덜 수도 있다. 국민 모두를 투기꾼으로 매도하고 세금만 걷으려고 한다는 힐난이 왜 나오겠는가.

부동산 거품은 정부뿐만 아니라 서민에게도 걱정거리다. 한 채 있는 집이 올라봐야 실현된 이익이 아닐 뿐더러 갚아야 할 대출금은 줄지도 않는다. 치명적 거품 붕괴가 올까, 폭탄 돌리기 아닐까 하는 걱정만 커진다. 세입자에게 집값 급등은 전세보증금과 월세 폭등으로 귀결된다. 거품과 투기를 잡고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정부 뜻은 좋다. 그런데 선의가 마냥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 더 빨리 ‘주거복지’로 눈을 돌릴 때다.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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