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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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드라마 보셨는갑네!

입력 2020-08-01 04:10:01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드라마 여주인공 ‘샛별이’처럼 생긴 직원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세요” 했으면 오죽 좋겠는가. 현실에서는 머리 벗겨진 봉달호 아저씨가 시커먼 마스크 쓰고 퀭한 눈빛 걸걸한 목소리로 당신을 맞는다. 엊그제 손님이 그러더라. “여기도 미모의 알바생이 있으면 하루 서너 번은 찾아올 텐데 말이죠.” 내가 말했다. “대신 아이돌 외모의 점주가 여기 있잖습니까.” 하마터면 단골손님 잃을 뻔했다.

드라마는 현실을 배반한다. 드라마에서는 계산대 안에 두 명이 다정하게 도란거리지만 현실의 편의점은 언제나 ‘나 홀로’다. 근무 교대를 하면 한 명은 어서 빨리 귀가해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픈 생각뿐이고 다른 한 명은 모든 일을 홀로 처리해야 하는 외로운 전투가 시작된다. 드라마에서는 다양한 손님과 요절복통 스토리가 펼쳐지지만 현실에서는 손님이 엎어버린 음료수 치우느라 콧바람 씩씩거리며 끈적끈적한 바닥을 닦고 또 닦고, 동네 중고딩이 몰려와 시식대를 라면 국물 난장판으로 만드는 대참사도 경험해야 한다. 이 물건 저 물건 들었다 놓았다, 진열대 모든 과자를 점검하듯 조몰락거리는 꼬마 녀석들을 흘겨봐야 할 것이며,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사람들 때문에 파라솔을 끝내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는 훈남 점장이랑 훈녀 알바가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가지만, 오호라 그건 어디 다른 행성 이야기런가. 현실에서는 매출 점검할 때마다 현금이 맞니 안 맞니 눈을 크게 떠야 하는 일이 자꾸 벌어지고, 담당 구역 청소를 제대로 했니 안 했니 진실을 다투는 날도 수두룩할 것이다. 어디 편의점뿐이랴. 우리는 각자의 현실 속에 ‘드라마와 다르게’ 살아간다. 그렇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고,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또렷이 잘 안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드라마를 챙겨 보는 이유. 어쨌든 우리는 낭만 속에 현실을 위로받기 때문 아닐까. 재벌 3세, 의사, 경찰, 작가, 회사원 같은 직업만 릴레이로 이어지던 TV 화면에서 내가 복작이는 일터가 배경이 되고, 내가 입은 근무복을 주인공이 똑같이 입은 모습을 보며 잠시 오늘의 무게를 잊는다. 비록 샛별이 같은 알바생은 우리 편의점에 없어도 까탈스러운 손님과 눈싸움 한판을 벌이는 장면, 새로 들어온 직원이 금전출납기를 잘 다루지 못해 버벅거리는 광경, 갑작스레 몰려든 손님들로 허둥거리는 에피소드를 보며 “깔깔깔, 맞아 맞아”, 마치 내가 드라마 속을 살아가는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본방’이 끝나자 휴대전화가 울린다. 역시 드라마의 여왕이신 우리 어머니…. “아들아, 너도 편의점 직원이 없어 며칠 동안 혼자 근무하고 그러냐.” 걱정스레 물으신다. “아따 엄니, 샛별이 보셨는갑네. 걱정마쇼. 그건 그냥 웃자고 작가가 지어낸 거여.” 돌아보니 내가 편의점에서 연속 근무한 기록 역시 36시간쯤 되는 것 같다. 며칠 동안 홀로 근무해봤나 견주는 것이 편의점 점주들 사이에는 ‘짬밥’의 표상이다. 쉿, 울 엄니에게는 비밀!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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