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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 미·중 전운 감도는 남중국해

입력 2020-07-22 04:05:01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은 일본 패망의 서막이었다. 당시 공습을 이끈 일본 해군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우리가 잠자는 거인을 깨운 건 아닌가 두렵다”고 했다. 하버드대 유학파 출신인 그는 미국의 국력을 눈으로 본 사람이다. 그의 우려대로 일본은 불과 6개월 뒤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는 참패를 당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이어 45년 3월 도쿄 대공습에 이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일본은 패망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은 지난달 17일 하와이에서 고위급 회담을 가졌다. 회담 장소는 진주만-히캄 합동기지였다. 진주만에는 일본군 공습 당시 침몰한 애리조나함 위에 세워진 애리조나기념관이 있다. 당시 공습으로 숨진 미국인 2403명 가운데 1000여명의 미군이 애리조나함과 함께 수장됐다. 우연일 수 있지만 폼페이오가 양제츠를 진주만으로 부른 것은 과거 일본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고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폼페이오 장관은 성명을 통해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완전히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동남아 동맹국 및 파트너들 편에 서서 중국과 맞서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폼페이오는 과거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판결을 근거로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이나 대륙붕 해역, ‘필리핀의 관할권에 속하는’ 미스치프 암초(메이지자오)와 세컨드 토머스 암사(런아이자오), 베트남 인근 뱅가드 뱅크, 브루나이의 루코니아 암사, 말레이시아의 제임스 암사 주변 해역 등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중국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선을 넘지 말라는 ‘최후통첩’으로 읽힌다. 이에 동남아 8개국의 미국 주재 대사들은 미국에 고맙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 해군은 지난 4~8일에는 핵 추진 항공모함 니미츠와 레이건 항모전단을 남중국해에 보내 훈련을 했다. 두 항모는 지난 17일에도 남중국해에 나타났다. 미 태평양 함대는 2척의 항공모함에 120대가 넘는 항공기가 실렸고, 1만2000명의 미군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미군은 이지스 구축함인 랠프존슨함을 피어리 크로스 암초 12해리까지 진입시키기도 했다. 골프공 크기의 물체까지 식별 가능한 미군의 최신예 트리톤(MQ-4C) 무인정찰기와 P-8A 대잠초계기 등도 남중국해를 드나들고 있다.

서방의 대중 공세도 거세다. 호주와 캐나다에 이어 영국은 홍콩과의 범죄인인도조약 중지를 결정했다. 영국은 또 5G 네트워크 구축에서 화웨이를 배제하기로 했다. 중국과 국경 충돌을 빚은 인도 역시 반중 정서가 심하다. 코로나19 사태와 홍콩 국가보안법 마찰, 남중국해 갈등을 거치면서 중국의 고립이 심화되고, 미국의 포위망은 구체화되는 형국이다.

미·중 갈등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남중국해 군사 충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핵보유국인 미국과 중국이 서로 먼저 도발하기엔 부담이지만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80년 전 일본은 석유금수조치 등 미국의 경제 제재를 돌파하려고 무모하게 진주만을 공격했다. 현재의 중국 역시 미국의 전방위 공세로 독이 올라 있다. 중국이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한 미국의 상황을 오판해 도발하거나, 미국이 영유권 분쟁에 개입하면서 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다.

‘예정된 전쟁’을 쓴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1941년 마지막 5개월간 미국과 일본이 보여준 것처럼 올 하반기는 미국과 중국에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의 우려처럼 미·중 전쟁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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