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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잃어버린 보수의 이름

입력 2020-07-03 04:05:01


가자!평화인권당, 깨어있는시민연대당, 국민참여신당, 코리아…. 4·15 총선에서 정당을 찍는 투표용지 길이는 48.1㎝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용지에 올랐던 저 생소한 정당 대부분은 당선인을 한 명도 내지 못했다. 제1야당인데도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 하나 얻지 못한 미래통합당도 이제 당명 자체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보수정당의 당명 변천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한나라당이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한 뒤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등판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이라는 당명을 내놨다.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새누리당을 탈당한 의원들은 2017년 1월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새누리당 간판이 내걸리던 날로부터 정확히 5년 뒤인 2017년 2월 13일에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당시는 자유한국당이 국정농단 사건 후폭풍을 맞아 최악의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뀐 날 여의도에선 한솥밥을 먹었던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이 자리에선 “나중에 ‘바른한국당’이라고 당명을 지어 합치는 게 좋겠다”는 말도 나왔다.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은 국민의당과 손을 잡았다가 헤어진 뒤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했다. 4·15 총선을 앞두고는 다시 자유한국당과 합쳤다. ‘바른한국당’ 얘기를 나눴던 의원들이 미래통합당으로 간판을 바꾼 친정으로 돌아간 셈이다. 극적으로 탄핵 이전의 정당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됐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을 기점으로 갈라졌던 보수세력이 다시 하나로 뭉쳤다는 이른바 대통합에 의미를 부여해 지은 이름이 바로 미래통합당이다. 합당 과정에 관여했던 통합당의 한 의원은 “‘통합’이라는 말을 꼭 넣으면 좋겠다는 당내 여러 인사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총선 이후 더 큰 세력화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임시 당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미래통합당의 통합 효과는 별로 없었다. ‘미래’와 ‘통합’을 붙인 당명에는 “대한민국이 걸어가야 할 길이고 대통합신당이 지향하는 가치가 응축된 이름”이라는 거창한 설명까지 뒤따랐지만, 그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총선 당일 밤 개표가 끝나지도 않았을 당시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모두 대표인 제 불찰”이라며 당대표직 사퇴를 선언했다. 그는 “통합당은 수년간의 분열과 반목을 극복하고 산고 끝에 늦게나마 통합을 이뤘다. 그러나 화학적 결합을 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통합당 입장에선 전화위복의 계기가 마련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번 총선에선 계파색 강한 의원 대부분이 공천장을 받지 못했거나 낙선했다. 총선 참패로 당 규모가 확 줄어든 탓에 계파 구도가 거의 사라졌다. 과거처럼 세력 다툼을 벌이지도 못할 처지가 된 동시에 계파 정치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됐다는 것이다. 다만 새 당명을 만드는 것도 계파 청산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럴듯한 간판 하나 못 세우고 좋은 말만 갖다 붙인 것 같은 선거용 당명을 만드는 정당이 유권자들의 마음에 드는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워 보인다. 진보 진영의 당명 개정에 참여했던 한 홍보 전문가는 “브랜드명은 적어도 10년 이상 유지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만드는데 정치권의 작명 작업에선 그런 고민을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름 그 자체에서 피어오르는 감흥을 기대할 수 있기는커녕 급조된 티가 나는 간판을 내건 정당은 생존할 수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베네치아 같은 도시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 도시에 대한 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김경택 정치부 차장 pty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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