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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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지갑이 사라진 시대

입력 2020-07-03 04:05:01


지갑에는 늘 얼마간 잔돈이 들어 있었다. 전철역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전철을 기다리면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좀처럼 현금 쓸 일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카드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제 정말 지갑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판기에 카드 결제기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카드를 들고 다니기 위해서라도 지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내 다양한 간편결제 방식이 떠올랐다. 모바일 신분증도 멀지 않은 시기에 자리 잡을 듯하다. 당장 내년에는 운전면허증이, 2022년에는 장애인등록증이 모바일 도입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주민등록증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고 저금통이 낯설어질 날도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닌 듯하다. 주머니에서 동전끼리 부딪쳐 짤랑거리는 소리마저 기억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지갑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현금 사용의 감소다. 우리나라 현금결제 비율은 20% 안팎이다. 2014년 40%에 가까웠던 것을 두고 보면 빠르게 감소하는 추세다. 10%까지 떨어지면 현금 없는 사회로 분류된다. 시대 변화에 맞춰 한국은행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 중간 과정으로 2016년부터 동전 없는 사회가 추진됐다. 그에 따라 거스름돈을 선불카드나 포인트로 쌓아주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벌써 3000만건을 넘어섰고 그 과정에서 66억원의 잔돈이 거래됐다고 한다. 1단계를 지나 올 하반기부터 2단계 시범사업을 앞두고 있다. 2단계에서는 계산 후 남은 잔돈을 계좌로 받을 수 있다고 하니 현금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우체통이나 공중전화부스처럼 현금자동인출기(ATM)도 곧 사라질 운명인 것 같다.

이 같은 변화는 동전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매년 동전을 만들고 폐기하는 데만 600억원을 쓴다고 하니 생각보다 큰 금액이다. 또한 거래가 투명하게 공개돼 지하경제로 인한 문제도 줄어들 수 있다.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그 편리함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변화에 따른 부작용도 우려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지폐와 주화가 쓰였던 기간을 따져보면 단 몇 년 사이 이뤄진 변화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져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현금 없는 사회로 진입한 나라의 경우, 카드 사용이 낯선 취약계층은 물건 하나 사는 일에도 어려움을 느꼈다고 하니 참고해볼 일이다. 간편결제가 젊은 세대 중심으로 활성화된 만큼 고령층의 소외감도 면밀히 살펴볼 만하다. 손자에게 세뱃돈을 주려고 하니 카카오페이로 송금해 달라고 해서 난감했다는 어르신이 낯설지 않은 시대다.

모바일 신분증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스마트폰을 다룰 줄 모르면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없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발급했던 도민증이 주민등록증의 시작이고 1962년 주민등록법이 만들어졌으니 변화에 적응할 시간도 충분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간편하고 손쉬운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복잡하고 낯선 방식일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겠다. 변화에 따른 다양한 의견 가운데 차별받는 이가 없어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구역을 확대하는 방식만으로는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

최근 한국조폐공사에서는 창립 70주년을 맞아 2020년 한국의 주화를 발행했다. 당시 접속이 어렵고 추첨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이제 주화도 우표처럼 실생활의 쓰임보다 수집의 성격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변화와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그러니 큰 혼란 없이 유연하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가끔은 그리워질 것 같다. 이를테면 할머니가 낡은 지갑에서 꺼내 준 꾸깃꾸깃한 지폐 같은 것들. 스마트폰 화면 속 숫자만으론 지폐 주름 사이사이에 쌓인 사정과 감정까지 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전석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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