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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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장마가 아픈 사람들

입력 2020-07-03 04:10:01


어렸을 적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등하굣길이면 평소에 못 입던 우비와 장화 차림이 마치 무적의 갑옷인 양 물웅덩이를 텀벙였다. 어른이 된 지금은 비 소식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출퇴근길 걱정에 한숨부터 나오지만, 내가 더욱 비 오는 날을 싫어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어떤 아이들은 궂은 날씨에 증상이 더 안 좋아진다. 치료를 잘 받는 성인 환자라면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으니 면담도 가능하고 그에 맞는 약 처방도 수월하다. 하지만 중증 자폐나 발달 지연이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불편한 몸과 기분을 다룰 줄 몰라 부지불식간에 폭발하기 일쑤다. 문제는 이들이 성장할수록 나이 들어가는 부모가 감당하기 점점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나 또한 진료실에서 증상이 악화된 환자의 폭력으로 다친 적이 몇 번 있는데, 한동안 비슷한 환자 이름만 대기자 명단에 떠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진료실에서 잠시 마주할 뿐인 의사도 느닷없는 폭력에는 이렇듯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운데, 평생 아이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보호자들은 오죽하랴. 어린 아기를 안고 진료실 문을 두드렸던 젊은 어머니는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져 있다. 이제는 진료실에 들어선 어머니의 눈빛만으로도 아이 상태가 보이지만,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줄어든다. 보호자와 치료자가 함께 머리를 싸매어 봐도 어느새 덩치가 엄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성한 아이의 폭력을 피할 방법이 없다.

보호자 없이는 아이를 봐줄 적절한 시설을 찾는 것도, 입원을 거부하는 중증 환자를 입원시키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부모 어깨 위에 가득한 짐은 좀처럼 가벼워질 기미가 없다. 다음 진료일까지 살아서 만나자는 아이 부모의 해탈한 듯한 농담을 듣고 덩달아 웃어보지만 오늘 따라 의사 가운마저 더 무겁게 느껴진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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