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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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따라 반응 않고 주님의 주권 인정하는 것이 형통한 삶

입력 2020-07-01 00:05:01
정광재 서울 다메섹교회 목사가 2016년 10월 서울 구로구 고척로 교회에서 열린 ‘CTS기독교TV와 함께하는 말씀과 기도 연합 대성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우리는 형통을 좋아한다. 보편적으로 형통함이란 모든 일이 뜻대로 잘돼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성경적인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함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성경에서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했지만, 그의 인생은 배신과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환경은 그러했지만, 요셉은 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환경에 따라 반응하지 않았고 환경이 그를 주장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다.

환경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주님께 반응하는 삶,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따라가며 요동하지 않는 삶, 이것이 형통한 삶이며 주님의 신부가 되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과 같은 곳에 시선을 둔다. 세상의 복과 형통의 개념을 그대로 신앙생활에 적용함으로써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세상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질타의 대상이 된다. 세상에서의 복의 개념은 소유, 편안함, 높음 등 외적 능력에 있지만, 성경적 복은 ‘하나님과의 친밀의 정도’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세속적 관점을 가진 채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혼돈에 빠진다.

소유의 개념에서 존재의 개념으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생활에서 여러 오해와 불신으로 성장과 성숙이 어렵다. 미혹과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막 2:22)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인은 초막도 궁궐이나 천국이 된다. 신앙인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환경을 초월한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자는 아직 어린 자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자가 돼야 한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야 한다. 이것이 형통이다.

신앙인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환경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다스림이란 누림을 말한다. 어떠할 때라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한다. 그래서 물 가운데 지날 때 물이 침몰치 못하고, 불 가운데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사르지 못함을 고백하게 된다.(사 43:2) 가난하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고 부하다 해서 교만하지 않으며 질병 중에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산다. 심지어 사람을 환경, 즉 소유로 판단한다. 외적으로 초라해도 주님 모시고 사는 자는 천국이 그의 마음에 있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도 주님 없는 사람은 지옥이다. 형통한 자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다.

주님과 함께하는 형통한 삶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바꿔야 하는 것은 가치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의 나라에 합당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천국의 가치관은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생명과 사랑이다.

신앙인은 살아가는 법이 다르고 목적이 달라야 한다. 신앙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그 이상의 것이다. 유한한 이 땅 삶의 어떠함에 목적을 두지 않고 더 높은 영원을 향해 가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되고서도 여전히 이 땅의 가치관을 따라 살며 예전의 것(명예, 물질, 권력, 편함)을 구함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고서도 오이와 참외, 부추, 파, 마늘, 고기 등 먹은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형통함을 누리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은 ‘감사’다. 주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알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함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의 가치관이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항상 최상의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신이 기쁘고 좋은 일에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불편해한다. 감사는 만족스러운 조건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존재의 정결, 즉 형상 회복에 있다. 하지만 물질계에 사는 우리는 존재보다 소유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해 오해가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 맡기고 의지함으로써 시작된다.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최상의 가치로 여겨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존재함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 가치를 두고 존재함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신앙인의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내면이 주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것이 내면의 회복, 즉 형상 회복이다.

성도는 이를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신앙인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흔들려선 안 된다. 존재함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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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 남영동 음악다방, 여의도광장, 광화문 네거리 등지를 돌아다니며 팝콘을 팔 때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음악다방에 가면 종업원 누나들이 어린 나를 불쌍히 보고 하루에 팝콘 10봉지 정도를 손님들에게 팔아줬다. 공원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도 지폐를 손에 쥐여주며 팝콘을 팔아줬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님 집에서 지내다가 과거 알고 지내던, 질이 좋지 않은 형들에게 붙잡혀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거리로 끌려 나왔다. 그날로 구두닦이 아저씨 밑에서 구두닦이 생활이 시작됐다. 손님의 구두를 가져오는 ‘찍쇠’와 구두를 닦는 ‘딱쇠’ 생활을 하며 서울역 근처 하루 500원짜리 쪽방에서 자거나 노숙을 했다.

서울 영등포 도로공원에서 노숙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키가 커서 멀대라는 별명을 가진 정호라는 아이와 자고 있는데 누가 흔들어 깨워 일어나 보니 양복을 입은 10여명의 중년 아저씨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 노동부 장관이 있었다. 우리를 취직시켜 주라는 그분의 말에 공무원 아저씨를 따라갔다. 일자리는 과자 공장과 철공소 두 군데였다. 정호는 철공소, 나는 과자 공장으로 갔다. 방화동에 있는 덕산제과였다.

노동부 장관이 소개해 온 아이라서 사장을 비롯해 임원들이 환대해줬다. 당시 그 공장에서는 ‘왔다 초코바’ ‘맘마 카라멜(캐러멜)’ ‘왕방울 사탕’ 등의 제품을 만들었는데 노동부 장관의 소개로 온 나는 완제품을 담는 박스를 붙이는, 쉬운 일을 하게 됐다. 덩치가 커서 사람들은 나를 15살 정도로 생각했다. 그곳에 일하던 누나들, 형들과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며 공장 생활에 적응해 갔다.

그런데 사장이 하루는 노동부 장관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노숙하다가 만나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사장의 태도가 돌변하더니 캐러멜 만드는 곳으로 배치됐다. 캐러멜을 만드는 작업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해야 했다. 힘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린 나이에 인맥의 중요성을 느낀 사건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지금도 권력, 명예, 물질 등을 중요시하는 소유에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외적 능력에 두지 않고 존재 자체에 두어야 한다.

일이 너무 힘들어 두 달 만에 공장을 나왔다. 임금 체불이 흔하던 시절이니 월급도 제때 받지 못했다. 노숙 생활로 돌아왔다. 구걸하고 있던 어느 날 점심이었다. 부잣집 아주머니가 나를 불쌍하게 봤는지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줬다. 아주머니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집에 데려가 좋은 옷도 사서 입혀줬다. 어린 눈에 비친 그 집은 어마어마하게 큰 부잣집이었다.

혼자 사는 그분은 나를 아들 삼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의 따스한 사랑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를 키우려 했던 것 같다.

공부하기 싫어했던 내게 자꾸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니 여간 부담되는 것이 아니었다. 권투 선수가 되고 싶었던 나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추석 전날이었다. 갑자기 부산 벧엘고아원에서 보모로 잡일을 하면서 나를 키웠던 큰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무턱대고 부산행 완행열차에 탔다. 벧엘고아원에 도착하자 큰엄마가 맨발로 뛰어와 나를 안으며 반겨 주셨다. 그리고 “광재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정광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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