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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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알뜻 말뜻] 애써서 가는 여행

입력 2020-06-27 04:05:02


영어로 여행이라는 단어들을 들여다본다. ‘trip’은 경쾌하게 걷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비즈니스 트립처럼 특정 목적을 가진 여행에 흔히 쓴다. ‘tour’는 회전도구처럼 돌고 도는 것을 뜻한다. 여러 국가나 도시 등을 방문하는 순회공연이나 순방에 쓴다. 팔도유람에는 투어가 적당하겠다. ‘voyage’란 말에서는 인생처럼 긴 항해가 떠오른다. ‘journey’는 멀리 가는 여정이다. 2012년에 개봉한 피터 잭슨 감독의 판타지 영화 ‘호빗: 뜻밖의 여정’ 원제목은 바로 이 단어를 썼다.

나의 여행은 대개 애써서 가는 것이다. 애써서 가는 여행, 그것이 ‘travel’이다. 단체여행이나 패키지여행을 하지 않으므로, 직접 여행지를 선택하고 자료조사를 하고 일일이 차편을 구하고 숙소를 정해 떠난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좌석이나 조지아 산악마을 우쉬굴리의 숙소도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마음에 흡족한 표를 구하려면 온라인 공간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그런 시스템이 없던 시절에는 현지에서 발품을 팔았다. 몽골에서는 운전사와 함께 길을 물으며 사막을 헤맸고, 인도에서는 갑자기 취소된 기차를 대신할 교통수단을 얻어 타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저런 사정을 알아내느라 여행을 가기 전에는 낯선 땅의 역사와 문화, 사회와 언어에 관한 책을 몇 권이나 찾아보곤 했다.

트래블은 ‘trouble’과 어원이 같다. 세 개의 기둥에 사람의 사지를 묶어두고 꼼짝 못하게 하는 고대 로마의 고문기구 트리팔리움(tripalium)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트러블이야 그렇다 치고, 트래블의 어원이 끔찍한 고문이라니. 세상의 많은 여행 중에 하필 트래블을 사랑하게 된 자는 여행을 가서도 곤경이고 여행을 떠나지 못해도 곤란한 운명인 것인가.

작년 유월, 나는 꿈꿨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 고원, 라진을 지나 두만강까지 굽이굽이 아름다운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기차여행을 하는 꿈을. 그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울란우데를 거쳐 이르쿠츠크를 다시 가보고 싶다고.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아예 모스크바까지 직행해 내친김에 스칸디나비아까지 여행할 수 있다면! 그런 꿈을 꿀 때면 나는 또 바랐다. 남북철도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여행하고 나면 그다음엔 다시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이번 생엔 고삐 풀린 말처럼 돌아다녔으니, 다음 생엔 여행 따윈 하는 일 없이 태어난 고향에서 고스란히 살다 죽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이번 생의 마지막 여행은 그렇게 근사하고 그렇게 장엄하고 또 그렇게 담대하리라고, 나는 설렜던 것이다.

그 설렘은 아직 유효하고 그 바람은 아직 충분하다. 코로나19로 묶인 발들이 곧이어 다가올 바캉스철을 이기지 못하고 동동거릴 테지만, 금방 이뤄질 것만 같던 남북철도 여행의 꿈이 조금쯤 멀어질지도 모르지만, 트래블의 어원을 생각하며 나는 묻는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여행은 어떤 종류일까? 애써서 가야 할 여행, 오늘도 우리는 트래블 중이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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