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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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바람을 맞으며

입력 2020-06-19 04:05:30


저녁에 비가 온다더니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습한 피부에 달라붙고 눈을 찌른다. 평소라면 대충 묶고 나섰을 텐데 습기와 더위 때문인지, 심란한 일로 꼬인 심사 탓인지 도무지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떼며 생각해보니, 머리를 손질할 때가 한참 지나기도 했다. 다음 장소로의 이동 시간을 계산하며 잠깐 망설이다 미용실로 방향을 돌렸다. 언제나 쑥대머리 상태로 나타나곤 했던 내가 익숙해서인지, 원장은 불쑥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쯔쯔쯔’라는 표현으로 머리 상태 진단과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는 잘못된 머리손질법에 대해 틈틈이 잔소리를 퍼부으며 능숙하고도 재빨리 머리를 다듬었다. 마지막 손질 후, 이제야 사람 몰골이라며 원장과 웃음 섞인 인사를 나누고 문을 열고 나섰을 때였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나는 문득 오즈의 나라에 떨어진 도로시마냥 딴 세상에 온 기분이 들었다. 분명 조금 전에는 꿉꿉하고 후텁한 바람에 숨이 턱 막혔건만 지금은 부드럽게 날아와 머리에 남아 있는 약간의 물기마저 말려주듯 결결이 흐르는 바람이 상냥하기까지 했다. 낮아진 구름만큼 선명해진 풍경과 맑은 공기 사이 섞인 비 내음 속에, 나는 마치 이국에 온 여행자인 양 잠시 멈춰 숨을 들이쉬었다. 불볕 같던 기온도 살짝 누그러져 일렁이는 머리카락과 얇은 여름 옷감 사이로 바람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순간 거대한 구름과 바람의 움직임은 안달복달 부잡스럽던 심기마저 부질없게 만들었다.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분명 일상에 짓눌렸던 조금 전과는 다른 내가 된 듯했다. 한 호흡만큼의 멈춤. 우리는 잠시일지언정 자연 속 일부인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자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러한 순간 없이는 강한 뙤약볕에 색이 바래듯, 생기와 인간다움도 일상에 매몰돼 자신도 모르게 빛이 바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바람결에 흘러갔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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