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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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집이 운다

입력 2020-02-05 04:10:01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 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 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 죽여 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중략)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 보면 십팔, 십팔 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중략)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처럼 싸 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중략)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 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꽝꽝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최금진, ‘아파트가 운다’)

집은 인간의 몸으로 비유될 때가 있다. 집과 인간의 몸은 내용 면에서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이 인간의 정신이 거처하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집은 인간의 육신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타락하여 몸을 함부로 다루면 몸이 앓듯이 인간이 집을 함부로 다루고 방치하면 집 또한 보존이 어렵고 급기야 망가지기 일쑤다.

근대 이전 농경제 사회에서 인간의 거처로서의 집은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장소였으며 아우라가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마당가에 놓인 돌확 속에 빗물이 고이면 한낮에 구름이 와서 화장을 고쳤다 가고 한밤에는 별과 달이 내려와 상형 문자놀이를 하기도 하였으며 대숲에서 경쾌한 소리로 자판을 두들겨대며 분주하게 댓글을 달던 참새 떼들이 몰려와 목을 축이고 가기도 하였다. 마른 국화 무늬가 배인 문창호지에 달빛이 스며와 얼룩덜룩한 벽면과 천장에 수묵화를 치기도 하였고 수시로 문틈으로 들어온 새 소리와 바람이 사람의 몸속 현을 울려대기도 하였다. 밭을 매고 돌아온 호미는 한밤중 허청에 걸린 채 허공을 매고 풀을 깎고 돌아온 낫은 대추나무 가지에 걸린 채 달빛을 베기도 하였다. 이렇듯 자연 사물들은 수시로 인간의 집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집은 자연을 몰아내었고 더불어 아우라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집은 환금성 외의 다른 뜻을 지니지 않게 된 것이다. 집은 신분과 계급의 지표이고 차별을 뜻하는 표지가 되어버렸다.

집이 앓는 소리를 내도 사람들은 듣지 못한다. 집이 아프다고 울어도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집에 들어 있는 방들은 열린 소통의 장소가 아니라 유폐와 단절과 고립의 섬으로 전락하여 자기소외를 가져오는 공간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소임과 역할을 잃어버린 방들은 급기야 거리로 뛰쳐나가 극심한 우울과 소외로 방황하는 영혼들을 호객하는 장소(노래방 소주방 전화방 등등)가 되어버렸다. 우리 시대 집이 심각한 증세를 앓아대고 있지만 누구 하나 주목하거나 꿈적하지 않는다.

자본에 의해 삶의 공간이 여러 층위로 분할되어 계층의 지형학을 형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최상위 주거공간이다. 또한, “압축된 근대성을 표상하는, 사회적 구조물(발레리 줄레조)”인 아파트는 재화의 수단이 된 지 오래되었다. 즉 아파트는 개인들의 무한욕망의 적극적인 표현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 시편에서 아파트의 평수가 십팔 평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궁핍의 지수이자 감정적 배설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에 의하면 가난은 사람의 몸속에 인화물질을 적재한다. 이것이 쌓이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폭발은 하나의 힘으로 모아지지 않고 파편화되어 산개될 뿐 아니라 자기 파괴적인 속성마저 지니고 있다. 이 시에서 아파트가 우는 행위는 결국 그 아파트로 대변되는 극빈계층의 울분을 말한다. 여기저기서 아파트들이 때로는 울고 때로는 욕설을 내뱉고 있다. 언젠가 울음과 설움이 거대한 산이 되고 파도가 되어 한 입 아우성으로 세상을 덮어올는지 모른다.

이재무(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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