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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선언… “설교자가 봉사자보다 더 높지 않다”

입력 2020-02-03 00:10:01
혜림교회 성도들이 지난달 12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혜림교회 제공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테제의 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 국민일보DB




‘예수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제가 1세기 교회 사역과 설교의 중심이었다면 2세기로 접어들면서 예수를 전하는 ‘사람’도 교회 사역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예수 승천 이후 예수만큼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권위를 갖게 된 것입니다. 2세기 초부터 인간 높임의 신학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는데, 감독정치 혹은 사제정치의 모습으로 교회사에 나타납니다.

3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확연하게 고위성직자의 권위에 많은 사람이 집중하거나 순종하는 형태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1~3세기의 기독교는 극심한 박해 중에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고난 중에 교회를 이끄는 교회지도자는 핍박과 순교와 같은 영적 형태를 동반함으로써 큰 거부감 없이 교인들로부터 신앙적 권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외부적 고통이, 내재된 문제를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곧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국교로 인정받음으로 인해 고난이 없는 영광만을 가진 교회지도자그룹이 교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들에 의해 중세교회는 예수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헌신과 섬김 구조에서 지배와 계급 구조로 변화된 모습을 역사에 드러냅니다.

종교를 기반으로 높은 정치적 지위를 획득한 그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생각을 교리로 정합니다. 성인이나 성물 숭배사상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신학이 그들에 의해 교회에 들어옵니다. 면죄부 판매, 성자 칭호 제정,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평신도의 성경 소유 금지, 연옥 교리 제정, 성경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전통 같은 것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새로운 복음이 됐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죄에서 무오한 존재이며 절대 권위를 지닌 존재라는 선언도 이 시기에 나온 새로운 신학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교황 이하에 추기경, 각국 주교단, 대교구, 교구 등으로 구성된 교회 기구와 교황청 소속의 국무성성 교회공무평의회, 각종 성성, 종교재판국 등 다양한 조직을 점진적으로 구성합니다.

일의 효용성을 위한 기구나 제도를 탓할 수는 없으나 중세를 지나며 교회는 예수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구조로 확연히 변질된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같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갖게 됐습니다. 예수 한 분만이 아니라 섬겨야 할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교회에 그런 지도자들이 늘어나자 교회는 더 많은 수입원이 필요하게 됐고 교황은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들으면서까지 각 나라의 교회나 정부로부터 종교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교황이 가진 땅의 소득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큰 성당,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가지려 했기에 늘 돈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 등이 횡횡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성직자의 길로 앞 다퉈 뛰어들었습니다. 당연히 자격 없는 많은 이들이 성직자가 됐는데 그중 다수가 성경과 성직에 대한 기본 이해조차 없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이나 글을 읽을 수 없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지도자의 자리에 섰고 많은 회중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야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실상 이처럼 타락한 종교지도자들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많은 사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어긋난 신앙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성경의 권위는 손상당하고, 정당성 없는 사람들의 높임 받음이 하늘을 찌를 때 바른 믿음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성경으로 돌아가고픈 종교개혁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처하는 조국의 교회 안에 계급적 서열이 느껴지거나 그것이 성도들에게 아픔이 된다면 이는 반 종교개혁적이요 비성경적인 서글픈 일입니다. ‘어디 전도사가 목사에게’ ‘어디 집사가 장로에게’와 같은 언어나 생각은 우리가 누구의 후예인지를 잊었거나 배우지 않은 결과입니다.

전도사 목사 장로 집사는 각기 다른 섬김의 직책을 가졌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더 존귀하거나 덜 존귀하지 않습니다. 설교하거나 교회를 치리하는 직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새신자나 교회당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더 높거나 낮을 수 없는 것이 종교개혁으로 다시 세워진 예수의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이 작은 교회의 문 앞에서 주차봉사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고 큰 영혼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종교개혁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말씀’ ‘오직 예수’를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교회라면, 목 놓아 교회개혁을 외치지 않더라도 거기에 종교개혁의 후예다운 바른 교회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김영우 혜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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