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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대통령이 여름휴가 가서 생각해야 할 것

입력 2019-06-03 04:05:02


선의가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고, 지도자는 늘 정책 결과에 의심 가져야…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
꼬인 국내외 상황으로 대통령 말에 화가 배어 있어…
휴가 때 명분·정의보다 냉정하게 현실에서의 미작동 원인 살펴보길


1993년 미국 아이오와주 연방상원의원 톰 하킨이 아동 노동착취로 만들어진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아동노동억제법’을 발의했다. 당시 방글라데시 등 저개발국가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다국적기업의 하청 의류공장에서 일했다. 이들의 처참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타개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미 의회의 압박에 하청업체들은 아동 5만명을 고용하지 않겠다며 항복했다. 공장을 떠난 아이들은 노동착취를 당하지 않고 나은 생활을 했을까. 아니다. 미 노동부는 대다수 아동이 더 영세한 공장으로 갔다는 분석보고서를 냈다. 그나마 노동환경이나 임금이 다국적기업의 하청업체는 좀 나은 편이었다. 유니세프는 사기·성매매조직에 내몰린 아이들도 있다고 보고했다. 선의는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지만 좀 사는 나라들이 도와주겠다는 착한 명분으로 대량의 중고 의류를 가난한 나라에 보낸다. 당장 필요한 이들은 일단 좋다. 구제 의류를 받아야 할 나라가 그 경제발전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건 초보적인 의류산업일 것이다. 그러나 구제 의류의 대량 유통은 의류산업 자체를 초토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통업자는 돈을 벌 테지만, 이 착한 행위가 그 나라에 도움을 줄까 손해를 끼칠까. 그 나라를 나아지게 만드는 건 선의의 의류 지원보다는 의류제조 기술을 제고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선의가 종종 현실에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방향은 맞는데 계산이 틀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 좀 세졌다. 취임 초기와는 사뭇 다르다. “막말로 국민 혐오를 부추켜 국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키는…”(5.13 수석·보좌관회의) “독재자의 후예”(5.18 기념사) “기본과 상식을 지켜줄 것”(5.29 을지국무회의) 등 자유한국당을 향한 표현에는 분노가 배어 있는 듯하다. “정상통화 내용을 정쟁 소재로 삼고 공익제보라는 식으로 비호하는 정당에 깊은 유감”까지 표했다. 대통령의 표정이나 숨소리조차도 메시지로 해석하는 게 정치다. 선택한 단어나 직설적 표현은 화가 났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그 심정, 이해는 한다. 소득주도성장으로 상징하는 경제정책은 이곳저곳에서 난타당하고, 가장 내세우는 남북 관계는 교착상태로 나아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수시로 동맹 미국과 엇박자를 낸다는 지적이 잇따르는데, 미국의 대북 정책도 오락가락 수준이다. 정의를 앞세운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를 꼬이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손해가 될 조짐이다. 역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시작한 적폐청산은 너무 질질 끌어 통제도 못하는데다 일부 여론의 저항적 기류가 뚜렷하다. 엊그제 울산에서 보듯 법 위에 군림한 민주노총의 행패는 여론에 싸늘하게 투영되는데도 어쩌지를 못한다. 대통령이 ‘선의를 갖고, 정의롭게, 주도적으로’ 내세운 정책들인데 현실은 꼬일대로 꼬여 있다. 여당 의원들은 온통 내년 선거를 위한 자기 정치에 관심 있고, 야당은 혐오 섞인 막말 비판에 재미들려 있으니, 마치 대통령 혼자 고군분투하는 형국인 것 같다.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 했다. 막스 베버는 ‘선의가 좋은 결과를 담보하는 건 아니다(소명으로서의 정치)’고 단언했고, 현실 정치의 본질을 꿰뚫은 마키아벨리는 ‘지도자는 자신의 정책이 항상 옳다고 믿어서는 안 되고 늘 결과를 의심해야 한다. 세상 일이 한 가지 어려움을 피하면 다른 어려움에 부딪히니 현명한 사람은 본질을 파악한 뒤 피해가 작은 쪽을 택한다(군주론)’로 결론 냈다.

여름 지나 찬바람이 불면 문 대통령 임기도 반이 지나간다. 그러면 국민은 이젠 중간결산 좀 해보자고 할 게다. 대통령이 화가 날 만한 국내외 상황이지만, 화를 낸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방향이 맞다고, 정의에 부합한다고, 열정이 있다고, 모든 현실이 그 의도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상식적 막말을 한다고 야당을 타박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것은 정치 일반의 영역이니 거기에 맡기면 된다.

대통령은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선의가 왜곡된 부분이 어딘지, 현실에서 잘못 작동하기 시작한 지점이 어딘지를 되짚어 볼 때가 됐다. 문 대통령은 선의를 갖고, 한반도 미래를 위해 북한을 대했는데 돌아온 건 미사일 발사와 비아냥뿐이다. 그러면 호흡을 가다듬고 냉정한 계산을 해봐야 한다. ‘선의=무능’으로 끝나는 건 국민으로서도 불행하다. 어느 책 카피가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니라 냉정이다.’

문 대통령이 공무원 법정 일수를 다 써 길게 여름휴가 가기를 권한다. 이번에는 착한 책만 보지 말고, 같은 편 의견만 듣지 말고, 일리 있는 반대 의견의 본질을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이전 정권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따뜻한 감성은 많이 봐왔다. 휴가 이후에는 고칠 건 고치고, 이해를 구할 건 직접 설득하고, 방향대로 갈 건 가겠다는 냉정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되면 화낼 일이 점점 많아질 것 같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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