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포용적 진보 배제하고 급진·배타적 진보 쪽에만
초점 맞춘 文정부 경제정책 함정에 빠지다
경제팀 교체를 계기 삼아 성장정책 수정하라…
공감·기대감 반영된 경제주체들의 심리 살펴야
얼마 전 40년 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J씨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먼저 요즘 우리 사회의 인사말에 대해 거론했다. 사업하는 지인들을 만나 ‘어찌 지내냐’고 물으면 대부분 ‘죽을 맛이야’ ‘죽겠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보통 ‘괜찮아요(I’m fine)’라고 응한다며 우리의 비관적인 인사말을 슬쩍 꼬집는다.
정말이지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비관적 반응이 조금 겸손 섞인 한국식 인사법인지는 몰라도 다들 죽겠다는 얘기를 달고 산다. 힘들어서·아파서 죽겠고, 심지어 우스워서·배불러서 죽겠다고 한다. 어떻든 ‘닥치고 죽겠다’는 식의 비관론은 문제다.
경제는 경제주체들의 심리적 동기에 좌우된다. 비관론이 경제동향에 대한 부정적인 기대로 이어지면 경제는 실체 이상으로 위축된다. 이렇듯 요즘 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부풀려진 측면이 없지 않아 문재인정부로서는 조금 억울하겠다. 분기 성장률은 비록 0%대라지만 여전히 플러스가 아닌가.
일자리가 좀처럼 늘지 않는 것은 구조적인 측면이 크다. 기술발전으로 기존 산업현장의 노동력수요가 감소하고 고임금 탓에 공장 해외이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베트남에 진출한 삼성의 전자부문 현지인 고용규모는 16만명이다. 그만큼 국내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문 정부의 일자리정책이 잘 먹히지 않는 배경이다.
문제는 일자리 수급상황의 구조적 측면을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재정을 활용한 단기적 대응에만 의존하기보다 근본적인 일자리정책이 필요하다. 즉 신산업 구축 내지 해외발(發) 수요를 유도해야 한다. 바로 혁신성장이다. 의료 교육 물류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육성을 통한 해외수요 창출도 절실하다.
그런데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에만 집착한다.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를 함께 내걸고 있지만 초점은 임금을 올려 성장을 꾀한다는 임금주도 성장론이다. 소득(임금)주도성장은 저임금체계를 시정한다는 의미가 크다. 다만 그 자체가 성장론으로 작동하기엔 미흡하다. 오히려 임금비용 증가로 인한 부작용으로 고용감소가 번지고 있다.
문 정부는 촛불에서 출발했지만 촛불 지지자 모두를 끌어안지 못하고 있다. 범 촛불세력은 크게 온건·포용적 진보와 급진·배타적 진보로 나뉘는데 문 정부의 경제정책은 급진·배타적 진보 쪽에만 맞춘다. 문 대통령과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그것만 옳다고 주장한 결과다. 광장의 촛불은 공감과 배려 없는 이전 보수정권의 적폐에 대한 불만에서 켜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문 정부는 자신들만의 선명성을 앞세워 범 촛불세력과 담을 쌓으려고 한다. 신념 과잉은 불통·독선·아집이란 함정에 빠지기 쉽다.
70%대를 웃돌던 지지율이 50%대로 하락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문 정부는 4·27 판문점선언, 9·19 평양선언 등 남북 관계개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각 분야의 적폐청산에 매진하고 있음도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경제문제는 당위론만으로 안 된다. 경제는 경제주체들의 공감과 기대라는 심리적 요인을 거슬러서 작동될 수 없다.
양극화 해소, 소득분배·복지 강화 등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요청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과 절차로 이를 이룰 것인지는 훨씬 더 중요하다. 먼저 경제주체들의 공감·합의와 더불어 예측가능성이 확보되고 공유돼야 한다. 경제주체들과 공유되지 않은 목표지상주의는 허망하다. 특히 특정 정책에 대한 집착은 최악을 부를 뿐이다.
문 정부의 내부그룹이 굳은 신념과 강한 목표의식으로 무장돼 있을지라도 의지와 능력은 별개다. 능력이 모자라면서 모든 분야를 주도하겠다면 정부실패는 피할 수 없다. 남북 관계개선은 문 정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일 것이다. 반면 경제정책은 테크노크라트에게 맡기는 게 낫다. 문 정부가 지향하는 정합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방향만 잘 조율해도 된다.
마침 경제팀이 홍남기-김수현 체제로 바뀐 만큼 이를 계기로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수정돼야 한다. 이 정책을 바꾼다고 저임금문제가 소홀히 다뤄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책수정은 문 정부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소통노력과 유연한 대처능력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집착형 독선주의의 함정에 빠진 문 정부의 경제는 어쩌면 영영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는 문 정부는 말할 나위도 없고 대한민국 모두에게 불행이 될 것이다. 그간 정부만 홀로 고집스럽게 ‘경제, 아직 괜찮다’를 외쳐왔지만 이제 정책수정을 계기로 경제주체 모두가 ‘괜찮아요’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