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북 제재 해제의 ‘선(先) 승인(approval)’ 조건을 강조하면서 4·27 판문점 선언 이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합의 이행에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며 남북 관계 개선 속도를 늦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방부 당국자는 11일 “남북 군사 분야 합의는 미국 측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9월 평양공동선언 부속합의서로 채택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가 미국 측과 긴밀한 협의를 거쳤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다만 남북 경제협력 본격화에 대비한 군사 합의 이행은 속도 조절에 들어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 평양선언 군사 합의 4조는 ‘남과 북은 교류협력 및 접촉 왕래 활성화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고 돼 있다. 군사적 보장 대책 중 남북이 해주 직항로를 열고 북한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를 허용하는 문제는 난항을 겪을 수 있다. 바닷길을 여는 것을 남북 합의로 추진할 수는 있지만 대북 제재 위반 소지가 변수다.
군 소식통은 “남북은 2004년 해운합의를 통해 제주해협을 북한 상선에 개방하도록 한 전례가 있다”면서도 “미국이 유류 환적과 관련한 대북 제재를 이유로 북한 선박 이동에 필요한 깐깐한 조건을 걸도록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 민간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는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5·24 조치로 차단된 상태다. 한강 하구 공동 이용을 위한 군사적 보장 대책 추진도 대북 제재 상황이 변화된 후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이 다음 달부터 이행키로 한 군사분계선(MDL) 일대 군사훈련이나 비행 중지도 미국 측 이의 제기에 부닥칠 가능성이 있다. 미군 당국이 평시 작전태세 유지, 한반도 전략자산 전개 등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 결과를 제시하며 난색을 표할 수도 있다.
남북 경협 기반을 닦는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 역시 대북 제재 영향권에 들어가 있다. 남북 정상은 평양선언에서 동·서해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을 올해 안에 열기로 합의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험하다. 사업 비용만 수조원 이상 드는 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위반 소지가 있는 장비와 유류 등이 공사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남측 열차를 이용해 북측 지역에서 실시하려던 공동조사가 유엔군사령부의 통행계획 승인 불허로 무산된 바 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자체는 대북 제재에 묶여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 시설 운영을 통해 북측에 제공되는 대량 현금이 제재 대상이다. 여권에선 개성공단 북측 노동자에게 현금이 아닌 현물로 임금을 지급하는 대안도 거론된다. 한 외교 소식통은 “금강산 관광도 비용을 철도·도로 차관 등 형태로 지급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남북이 합의한 비무장지대(DMZ) 평화지대 조성을 위한 화살머리고지 유해 공동 발굴, 지뢰제거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그동안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대북 제재와 거리가 먼 문화·예술·체육 분야 교류 역시 순항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관건은 대북 제재·압박 효과를 확신하고 있는 미국과 남북 관계 개선으로 일정 수준 돌파구를 찾으려는 우리 정부 간 간극을 잡음 없이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김경택 최승욱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