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구조 전체를 진중하게 살피지 않고
가시적인 수치 상향 조정에만 매달렸다는 점이 문제다
일거리가 일자리를 만드는 법이다.
혁신성장 앞세울 때 비로소 소득주도성장은 뿌리내릴 수 있을 것
“조금만 기다려 달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2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해 한 발언이다. 청와대가 주도해온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난과 비판에 대한 변명이다. 연말까지 기다리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참 답답하다. 무엇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시감(旣視感)을 지울 수 없다. 문재인정부도 기다리라는 타령인가.
4년 전 세월호가 침몰할 때 안내방송도 ‘기다리라’였다. 구조될 줄 알았던 수백명의 승객들은 그 말만 믿고 대기했다. 하지만 결말은 참담했다. 장 실장의 기다리라는 발언과 침몰하던 세월호의 안내방송을 대비하는 것은 부적절할지 모른다. 아니, 그 정도로 지금 민심은 현 정부 경제정책을 못미더워한다. 불안감은 차츰 분노로 바뀌고 있다.
장 실장 등이 금과옥조로 삼아온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이미 지난 5월 신뢰를 잃었다. 소득주도성장은 임금을 올려서 소비를 늘리고 그로써 경기활성화, 즉 성장을 유도한다는 것인데 정부가 발표한 통계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청와대는 심지어 통계수치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정책의 당위성 주장에 급급했다.
당시 1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부문) 결과는 하위 20% 가구(1분위)의 소득이 1년 전에 비해 8%나 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1분위 소득이 많이 감소한 것은 아픈 대목”이라고 하면서도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 이상이라며 저소득층 소득 감소와 최저임금 인상은 별개”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납득할 수 없다는 지적이 일자 청와대는 부랴부랴 홍장표 전 경제수석을 앞세워 ‘긍정적 효과 90%’를 뒷받침하는 주장을 폈다. 홍 전 수석의 설명은 자의적인 통계해석이라는 점에서 전혀 신빙성이 없지만 설혹 그것이 옳았다고 해도 정책의 신뢰 상실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주장만 옳다며 중언부언하는 정부를 누가 믿고 따르겠나.
가계동향조사는 최저임금 인상효과를 분석하는 지표일 수 없는데 왜 청와대가 무리해서 변명하려고 했었는지 참 안타깝다. 지난 23일 발표된 2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 역시 하위 20% 소득은 지난해보다 7.6% 줄고 양극화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판론이 거세게 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래저래 청와대가 아마추어 감각으로 정책을 구상하고 밀어붙이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당초 30만개 이상 늘리겠다던 일자리 목표치도 22일 장 실장의 국회 발언을 보면 슬그머니 내려앉아 있다. “매년 전년 대비 20만∼30만명씩 늘어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10만∼15만명 정도가 정상적일 것”이라고 꼬리를 내린다.
나는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로 등을 내세운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동의한다. 경제운용 과실을 기업과 가계가 나눠 갖는다고 할 때 소득주도성장이 강조하는 것은 가계 쪽에 경제과실을 좀 더 보장하자는 의미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만성적인 저임금구조는 수정돼야 하고, 부끄러움이 앞설 만큼 심각한 장시간 노동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허리에 꿰어 쓸 수는 없다.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경제운용의 과실을 가계 쪽, 특히 저소득층에 더 준다고 해도 전제돼야 하는 것은 확장적 경제운용이다. 그건 바로 경제환경의 혁신이다. 경제환경은 규제 철폐 등 투자환경이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제대로 작동하고 개선과 혁신 또한 가능하다. 혁신성장을 앞세울 때 비로소 소득주도성장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현 정부가 일자리 정부임을 자임하고 말마다 일자리를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자리보다 일거리다. 경제환경이 제대로 갖춰질 때, 기업의 투자가 늘고 일거리를 만들 때, 일자리는 자연스럽게 생긴다. 경제환경의 개선과 혁신이 곧 일자리로 이어지는 셈이다. 일자리 정부는 경제환경개선 정부, 혁신성장 정부의 다른 이름이어야 맞다.
도마에 오른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등은 경제구조 전체를 진중하게 살피지 않고 가시적인 수치 상향조정에만 매달렸다는 점이 문제다. 최저임금 10%대 인상, 보조금 지원액 상향조정 등은 당장 듣기에는 좋지만 그로 인한 파급효과를 치밀하게 점검하지 못해 문제가 불거졌다. 그야말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존재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위성과 의지만 앞세워서는 경제 위축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경제가 흔들리면 어렵게 마련한 남북관계 개선국면도 제대로 풀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무슨 정책이든 추진력 상실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선 장 실장부터 교체해야겠다.
대기자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