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청사초롱-이창현] 폭염의 정치, 척서단과 옥탑방

입력 2018-07-25 04:05:01


전국적으로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진다. 며칠 전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는 정조대왕의 척서단 이야기를 꺼내며 폭염 속에서 정치인의 역할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척서단이란 한자 뜻 그대로 ‘더위를 씻어버리는 환약’을 말한다. 기록에 의하면 척서단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건설할 때 뜨거운 삼복더위에 노역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사한 환약이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스스로 한의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척서단은 노역하는 백성들에게 의학적 효험이 있었을 것이고, 나아가 다른 백성들에게도 정치적 효험이 높은 처방이었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 강북지역의 옥탑방에 한 달간 살아보겠다며 입주했다. 시원한 관사를 놔두고 에어컨도 없는 9평짜리 옥탑방살이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폭염 속에 옥탑방 표면온도가 60도 가까이 된다고 한다. 박 시장은 이제까지 서울시장이 필요한 곳에 찾아간다는 취지에서 현장 시장실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강남북 균형발전의 화두를 내세우며 삼양동 옥탑방에 오른 것이다.

현장 시장실은 2012년 입주 4년이 지나도록 600여 가구가 미분양이던 은평 뉴타운의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해서 처음 시작되었다. 은평 뉴타운에서 미분양 물건을 완판한 후에 박 시장은 20여 자치구를 방문하는 것으로 현장 시장실을 이어갔다. 그는 참모회의에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사자성어를 빗대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정치인이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에 서울시장이 옥탑방살이를 시작하는 데 대해서 여론은 엇갈린다. 박 시장은 “책상머리에서 아무리 정책을 만들어도 절박한 시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라며 “책상 위 보고서는 2차원의 현실밖에 보여주지 못하지만 시민 삶은 3차원으로 복잡하고 다각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야당에서는 이 말을 빗대 그의 생각이 1차원에 머물며, 전형적인 보여주기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옥탑방살이를 결정하기까지 시장 스스로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 시장 3선 이후에는 서울시정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큰 정치적 담론이나 가시적인 정책성과를 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시장이 옥탑방살이를 결정한 것이기에 이것은 그의 미래에 아주 중요한 결정이 될 것이다. 박 시장은 현 단계에서 서울시정에 더욱 전념하며, ‘내 삶을 바꾸는 첫 번째’ 시장이 되겠다는 6년 전의 초심을 이어가려고 한 것이다.

정조대왕의 척서단처럼 박 시장의 옥탑방살이가 국민적 공감을 얻어내려면 옥탑방에서 개별적인 서민 정책을 수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지도자로서의 철학과 비전도 함께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즉, 서민생활의 불편을 하나하나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지역 간, 계층 간 불평등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자신만의 국정 철학과 비전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의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의 문제 등에 대한 비전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옥탑방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이 서민생활을 개선하는 작은 것일지라도, 그 속에 정치적인 철학과 비전 그리고 상상력이 담겨 있도록 해야 한다.

박 시장이 한 달 후에 옥탑방을 떠날 때 ‘앵커 브리핑’처럼 ‘시장 브리핑’을 하나 마련해주기 바란다. 시장 브리핑에는 서민생활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깨알같이 제시하는 것을 뛰어넘었으면 한다. 시장 브리핑에서는 서울시정의 장기 비전과 함께 대한민국의 기준을 바꾸려는 가치와 철학이 나오기 바란다.

앵커 브리핑이 갖는 은유적 의미처럼 시장 브리핑에도 박 시장의 키워드가 함축적으로 담겼으면 좋겠다. 폭염 속에서 이뤄지는 삼양동 옥탑방살이가 정조대왕의 척서단 같이 전체 서울시민에게 위로가 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한줄기 소나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