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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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임성수] 계엄령

입력 2018-07-23 04:10:02


1987년 6월항쟁 이후엔 책에서나 봤을 법한 ‘계엄령’이 연일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국군기무사령부가 지난해 3월 박 대통령의 탄핵심판에 대한 선고를 앞둔 시점에 계엄령을 검토한 문건이 공개되면서다. 수사가 진행 중이라 진상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정권 차원에서 계엄령 검토 계획을 세웠다는 의혹이 짙다.

헌법 제77조는 계엄령에 대해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비상계엄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같은 헌법적 권리에 대해서도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따라서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계엄령이 아예 없거나 극히 최소화돼야 한다. 민주주의와 계엄은 멀면 멀수록 좋다.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령을 가장 많이 선포한 권력자는 박정희다. 시작부터 계엄이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내가 곧 국가’라고 생각했는지, 박정희는 자신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국가비상사태로 여기고 계엄을 발동했다. 5·16으로 시작해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시위, 1972년 10월 유신, 1979년 부마항쟁 등 4차례나 계엄령을 휘둘렀다.

계엄의 시대는 계엄으로 끝이 났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한창이던 1979년 10월 18일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내렸다. 힘으로 짓누른 강경 진압이었지만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일주일여 만인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권력 내부 암투였는데, 부마항쟁 대응을 놓고 의견이 갈렸던 점도 영향이 컸다.

촛불집회는 부마항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연인원 1700만명이 모인 집회였지만 폭력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촛불을 든 시민은 오로지 구호로만 정권 퇴진을 촉구했다. 전 세계가 찬탄했던 집회가 진행되던 그 시각에 군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집회가 폭동으로 확대되는 것을 전제하고 진압 병력 배치 방안 등을 논의한 것이다. 쓰러져가던 박근혜 정권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국민은 기어이 정권을 몰아냈고, 기무사 계엄령 문건은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계엄령을 휘둘렀던 박정희 정권, 계엄령밖에 의지할 데가 없던 박근혜 정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 셈이다.

임성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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