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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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산다] 제주도에 태풍이 오면

입력 2018-07-21 04:05:01


이달 초 우리나라에 올해 첫 태풍이 올라왔다. ‘비의 신’이라는 이름의 ‘쁘라삐룬’. 제주도 사람들은 태풍 소식이 있으면 모두 예민해진다. 나 같은 이주민들은 더욱 그렇다. 쁘라삐룬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때가 6월 30일. 우리나라에 도착하려면 며칠 남았는데도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공연히 부산해졌다. 바닷가에 사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할 일이 특히 많다. 태풍에 날아갈 물건은 모두 건물 안에 넣어야 한다. 카페의 파라솔, 의자, 테이블을 들여놓고 옥외 수도전의 물통과 청소도구, 쓰레기통, 화분도 창고에 넣어야 한다. 건물의 부속물은 잘 붙어있는지, 혹시 바람에 떨어져나갈 물건은 없는지, 조금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제주에 이주하고 처음 만난 태풍은 2년 전 ‘차바’였다. 차바는 제주도 동쪽을 치고 부산, 울산 방향으로 올라갔다. 그날 밤 10시쯤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뜬눈으로 불안에 떨었다. 처음 듣는 요란한 바람소리, 물건이 바람에 날아와 벽과 창에 ‘딱딱’ 부딪치는 소리,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소리…. 전기도 통신도 끊겼다. 새벽 5시쯤 태풍의 눈에 들어온 듯 10분 정도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다시 강하게 불고 8시쯤 잦아들었다. 이삿짐을 임시 보관하던 뒷마당 천막이 쓰러지고 물건들이 돌담에 처박히거나 이웃 밭으로 날아갔다. 태풍에 천막은 무모한 일이다. 카페 앞 돌담이 무너졌고 플라스틱 의자는 100m 떨어진 밭까지 가서 주워왔다. 10시쯤 정리를 시작하자 이웃이 빵 한 봉지를 사들고 왔다. “김밥 사러 마트에 갔는데 다 떨어졌어요. 전기가 나가서 집집마다 밥을 못해요.” 다른 이웃이 또 찾아와 안부를 묻더니 “괜찮아요. 우리는 제주에 살잖아요”하고 떠났다.

쁘라삐룬이 처음 예보됐을 때 진로는 서귀포 남서쪽 해상을 지나 호남 내륙에 상륙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진로도 화살표는 모슬포를 관통해 목포로 가는 방향이었다. 7월 1일 오전이 되자 북상 속도가 늦어지며 화살표는 제주도 동쪽을 스치고 여수 부근으로 상륙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날 오후 다시 화살표는 성산 앞바다를 지나 마산쯤을 가리켰고 2일 오전에는 부산 앞바다를 통과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정오에 화살표는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비켜가고 부산보다 일본 쓰시마에 더 가깝게 이동했다. 3일 동안 태풍 진로가 예상보다 동쪽으로 많이 이동한 것이다.

정작 태풍이 오기로 한 3일 제주도 날씨는 평소보다도 바람이 약했다. 오후가 되며 쁘라삐룬이 제주도를 벗어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4일 동안 졸인 가슴을 달래려 차로 아내와 성산 일출봉 부근으로 파도 구경을 나갔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리포터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태풍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태풍 쁘라삐룬은 내일 새벽 우리나라에 본격 상륙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에 상륙할 예정이라고? 제주도는 지나갔는데. 제주도는 우리나라 아닌가? 리포트 말미에 제주도는 큰 영향 없이 지나갔다는 정도 붙여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기상청 태풍 진로를 들여다보며 걱정하고 지낸 제주도 사람들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기 있으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그들이 알아주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에 제주도가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어쩌려고 하는 억지를 부리고 싶어졌다.

박두호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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