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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이동훈] 한은, 비트코인 어찌할꼬?

입력 2018-07-12 04:05:02


러시아월드컵에서 ‘보조 심판’ 비디오 판독 시스템(VAR)이 등장해 축구팬들의 눈길을 잡았다.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워 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축구 강대국을 편들어 주는 기계로 전락했다. 멕시코 선수가 기성용을 걷어찬 뒤 골이 들어갔지만 심판은 VAR 판독을 외면했다. 반면 한국이 세계 1위 독일을 상대로 두 골을 넣을 때는 심판은 VAR로 달려가 한국팀이 정말 골을 넣었는지 따졌다. 스포츠의 최대 가치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도입한 VAR은 심판의 권위와 자의적 판단에 막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기계도 사람이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방향이 달렸음은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가상공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특정 후보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 조작된 사실에 수많은 페친들은 분노했다. 드루킹의 댓글 농락에 이용당한 네이버도 자유로울 수 없다. SNS와 검색포털에 등을 돌린 국내외 사이버 민초들은 이제 암호화폐에 기대를 걸고 있다. 분산장부와 암호화 기술을 바탕으로 한 블록체인이 소수의 정보 독점과 약탈적 금융을 척결하고 분권화된 세상으로 가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소수에 집중된 기득권을 내려놓고 제대로만 운용하면 우리 경제가 퀀텀점프할 수도 있다. 각국 중앙은행과 금융 당국이 앞다퉈 대책과 연구보고서를 내놓는 데서도 그 잠재력을 느낄 수 있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들은 오는 20일 공조방안을 논의한다. 한국 금융위원회도 암호화폐 관련 정책과 감독업무를 맡는 금융혁신기획단을 운용키로 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행이 지난 6일 내놓은 ‘암호자산과 중앙은행’이라는 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그동안 금융 당국은 암호화폐의 급등과 급락, 거래소 해킹 등 부정적 요인만 부각시킨 측면이 강했으나 한은 보고서는 암호화폐의 본질과 경제적·법적 성격 등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다만 보수적인 중앙은행 특유의 복잡한 속내가 감지된다. 한은은 암호자산이 변동성이 매우 커 현금 신용카드 등 기존의 지급수단에 비해 경쟁력이 낮다고 분석했다. 또 가격을 표시하는 척도나 가치 저장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봤다. 감히 암호화폐가 법정화폐에 도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한은은 다만 화폐로서의 암호자산을 부정하면서도 ‘현시점에서’라고 단서를 달았다. 즉 향후 기술 문제 등이 해결되면 투자자산 및 지급수단으로 활용이 확대될 수 있음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은이 독점해 온 발권력과 통화정책이 훼손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셈이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에게 중앙은행은 타도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한은의 딜레마를 엿볼 수 있다. 암호화폐를 인정할 경우 중앙은행의 기득권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10년 전 리먼브러더스 사태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짜 이유가 뭔지 알리고 ‘장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제안됐다. 중앙은행, 시중은행, 감독기관 등 모두 리먼의 장부 조작을 감지하지 못했다. 원인은 잘못된 장부 작성에 있었음에도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 등 중앙은행들은 유동성 확대에 나서 오히려 ‘월가의 1%’만을 배불린다는 주장이다.

2014년 홀연히 사라졌던 사토시로 확실해 보이는 인물이 지난달 29일 임시 홈페이지를 열었다. 책 발간을 예고하며 일부 발췌문을 공개한 것이다. 그는 2009년 1월 3일 은행들에 대한 2차 구제금융 단행으로 ‘불가피했다’며 비트코인 창안 배경을 설명했다. 암호화폐와 관련한 국제 규제 논의가 본격화될 시점에 사토시까지 다시 등장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각국 중앙은행과 금융 당국이 ‘신뢰 사회’를 위한 사토시의 블록체인 혁명 제안을 받아들일지, 1%만을 위한 규제일변도 정책을 내놓을지 전 세계 99%가 지켜보고 있다.

이동훈 경제부 선임기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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