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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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비행기에서 생긴 일

입력 2018-07-11 04:05:01


진심과 진실이 왜곡되는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만다
포화상태 이른 스마트사회
이제 새 버전이 등장할 텐데
편리함을 넘어설 새로운 키워드는 무엇일까


“고마워요! 사랑에 빠지시길 바랄게요.”

비행기에서 좌석을 바꿔주는 사람에게 흔히 할 수 있는 인사는 아닌데 로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지난 4일 남자친구와 뉴욕에서 댈러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둘의 좌석은 앞뒤 줄에 떨어져 있었다. 뒷줄의 남자친구 옆자리에는 헬렌이란 이름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앉았다. 흔쾌히 좌석을 바꿔준 헬렌에게 로지는 아직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당신의 운명적 사랑이 여기 앉을지도 몰라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남자였다. 젊고 훤칠하며 꽤 잘생겼다.

헬렌과 통성명을 한 남성은 유안이었다. 대화가 시작됐다. “헬스트레이너예요.” “어, 저도 그런데요.” “아직 싱글입니다.” “어머, 저도요.” 뒷줄에서 듣고 있던 로지는 차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댈러스까지 4시간 동안 둘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나 싶더니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경쟁하듯 말하고 있었다. 유안이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자 헬렌은 “정말 멋진 분”이라고 했다. 좌석 사이 팔걸이를 사이좋게 공유했고 그러다 살이 닿아도 괘념치 않았다.

마침내 대중교통 러브스토리의 클라이맥스인 ‘어깨에 기대 잠들기’로 이어졌을 때 흥분한 건 로지와 남자친구였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 그것도 좌석을 바꿔주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막 시작한 것이다. 무심코 던진 농담은 현실이 돼버렸다. 로지는 앞좌석의 영화 같은 상황을 틈틈이 촬영했다. 등받이 사이로 보이는 유안의 미소, 그 어깨에 기댄 헬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스마트폰에 담겼다. 댈러스에 내린 뒤 이를 시간 순서로 편집하고 자막처럼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트위터에 올렸다.

로지의 트윗이 댓글 몇 개로 수명을 다했다면 둘의 만남은 해피엔딩이 됐을지 모른다. 누구나 한번쯤 꿈꿨을 러브스토리는 30만명이 리트윗했고 100만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대중은 둘이 비행기에서 내려 나란히 짐 찾으러 가던 마지막 장면 이후를 궁금해 했다. 미디어가 달려들었다. 유명 방송인이 이를 언급했고 USA투데이는 유안이 미국 국가대표 출신 월드컵 해설가의 동생이란 사실을 알아내 보도했다. ‘투데이’ ‘굿모닝 아메리카’ 같은 토크쇼에서 로지와 헬렌과 유안을 섭외하고 나섰다.

관심은 이야기를 상품으로 만들었다. 로지는 방송에서 목격담을 풀어놓은 뒤 영화화할 파트너를 구한다고 트위터에 게시했다. 투데이 쇼에 나와 헬렌이 얼마나 멋진 여성인지 한참을 얘기한 유안은 유명인사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어떤 방송도 헬렌을 섭외하지 못했다. 그는 이 로맨틱 다큐멘터리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풀네임이 알려지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춰버렸다. 언론은 사람들 눈을 피해 숨은 거라고 해석했다. 인생에 몇 번 없을 우연한 만남은 스마트폰과 SNS의 무한연결 사회에서 옆길로 새버렸고 그렇게 막을 내렸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에 관해 말하길 좋아하는 DNA가 있는 듯하다. 그것이 만드는 집단적 시선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변질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 힘을 노리고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지난주 경기도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태권도 맘충’이란 고약한 타이틀로 알려졌다. 태권도장 버스가 좁은 길을 지나는데 앞서가던 화물차가 멈추더니 한참 길을 막고 짐을 부렸다. 화물차의 여성과 버스의 태권도 관장 사이에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여성은 학부모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아이들 태운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난폭하게 달려와선 차 빼라고 화를 내더군요. 그런 도장에 무서워서 아이를 보내겠어요?” 이 글로 태권도장에 학부모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그러자 관장이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했는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버스는 경적도 울리지 않고 오랫동안 기다리다 조심조심 운행하고 있었다. 결국 여성의 거짓말로 판가름이 났다. SNS 입소문을 이용해 학부모와 태권도장의 관계를 변질시키려던 시도였다.

무관해보이는 두 사건은 세상이 이렇게 스마트해지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란 공통점을 가졌다. 진심이 본의 아니게 왜곡되고 진실을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만다. 스마트폰과 SNS는 우리가 좋아하는 ‘남의 얘기’를 아주 편하게 하도록 해줬는데, SNS를 끊고 스마트폰을 버리는 이들이 갈수록 느는 걸 보면 부작용도 심각한 수준이 된 듯하다. 마침 둘 다 포화상태에 왔다. 이제 스마트 사회를 대체할 새로운 ‘○○ 사회’가 등장할 것이다. 키워드는 아마도 ‘인간관계의 복원’이 아닐까.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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