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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신창호] 북핵 폐기, 생각보다 어려운 길

입력 2018-07-10 04:05:02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진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단기간에 북한의 핵 개발이 완전 중단되고 북·미 수교가 이뤄질 듯하던 분위기는 이제 장기 협상 모드로 돌입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지만 협상의 구체적인 실마리는 잡히지 않는 형국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했고, 이전 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평화 정착 노선으로 바꾼 문재인정부는 여전히 북핵 폐기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찬란한 희망은 14년 전에도 솟아오른 적이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 당시 미국 행정부는 CIA 등 정보기관이 파악한 정보에 따라 북한이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서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여러 가지 대비책을 마련했다. 선제공격 전략부터 협상까지 다양한 방안이 모색됐다. 북한 고위 당국자의 ‘서울 불바다’ 발언도 이때 퍼졌던 미국의 선제공격설에 따라 나온 말이다.

1994년 10월 26일 북·미는 북한 핵 개발을 포기하면 경제적 보상 외에 북·미 수교도 보장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핵 합의’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 당사국(미·중·러·일)은 북한의 평화적 핵 사용을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만들어 핵폭탄 대신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주기로 했다.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건설비용은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부담했다.

그렇게 8년이 흐른 2002년 10월 조지 부시 공화당 행정부는 ‘제네바 핵 합의’ 폐기를 선언했다. 북한이 약속을 어기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평안북도 영변 핵 시설을 돌아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김정일정권이 봉인된 폐연료봉을 비밀 시설로 옮겨 핵무기 원료로 농축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 사찰을 전면 거부하고 KEDO의 경수로 원전 건설 거절을 선언했다. 북한으로선 6·25전쟁 이래 최대 적국인 미국으로부터 체제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핵보유국 외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도 김정은정권의 기저엔 이런 판단이 흐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 체제 지속과 경제적 보상 약속을 수사로만 여길 개연성이 높다. 미국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없는 한 핵무기 개발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선 핵 개발 포기, 후 경제적 보상’의 방법으론 설득하기 힘들다. ‘단계적인 핵 포기=경제적 보상의 동시 행동’ 방식을 북한이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반면 미국은 북한이 구체적인 핵 개발 포기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경제적 보상이란 당근을 먼저 주지 않을 게 틀림없다. 수차례 약속을 어긴 북한을 100% 믿지는 못한다.

지난 3∼6월 초반까지 우리 국민 전체를 술렁이게 했던 북핵 폐기와 항구적인 남북 평화 정착의 기대는 그만큼 어려운 길인 셈이다. 또 이 기대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달성하기 힘든 꿈이기도 하다. ‘김정은 북한’과 ‘트럼프 미국’이 향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물거품이 될 수도, 실현 가능한 희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하수구 물을 봐도 ‘절대 안 마시겠다’고 말하지 말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단언하지 말라는 경구도 있다. 둘 다 국제 외교에선 상식으로 여겨지는 금언이다. 국가 간 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외교 무대에선 어떤 사안도 쉽게 결말지어지는 법이 없다.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선 굴복시키든가, 스스로를 깎아야 하는 게 외교 협상이다. 최상뿐 아니라 최악의 결과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문제는 찬란한 외침이 아니라 쓰디쓴 확인’이다. 남북이 60년 넘게 서로 다른 체제를 지닌 채 군사적으로 대립해 온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북·미 협상 결렬이라는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는 게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일지 모른다.

신창호 토요판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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