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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정부혁신이 안 보인다

입력 2018-07-10 04:10:01


유능한 정부를 위한 노력이 바로 정부혁신인데 현 정부 들어 정부혁신이란 말조차도 듣기 어려워
돈을 써 생색내고 있지만 재정 지출 계속 늘리려면 정부 군살부터 빼는 게 예의


국가, 더 좁게 정부에는 세 가지 직업이 있다. 첫째는 경비원이다. 우리의 24시간을 지켜주는 일이다. 법치 국가와 안보 국가의 면모다. 둘째는 유모다. 아이들의 밥을 먹이는 일부터 노인들의 용돈 챙겨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국민을 보살핀다. 복지국가의 면모다. 셋째는 상인이다. 돈은 기업이 벌고 정부는 돈을 쓴다는 통념은 옛말이다. 정부는 물주이자 여차하면 ‘조직의 뜨거운 맛’을 보여줄 수 있는 대부로서 활약한다. 산업 국가의 면모다.

정부가 이런 일들을 더 많이, 더 크게 하면서 돈 쓸 일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 미국의 정부 지출이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불과했다. 50년 전엔 25%였다. 지난해 이 수치는 42%를 기록했다. 한국은 산업화 초기였던 1970년에 정부 총지출이 국내 총생산의 20%인 5570억원에서 2017년에 35%인 490조원이 되었으니 약 900배가 는 셈이다. 근대국가론의 효시인 홉스가 성경에 나오는 괴물을 인용해 묘사했던 ‘리바이어던’은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수준으로 커졌다. 하지만 커진 게 문제는 아니다. 커진 정부가 국민들에게 세금을 공정하게 걷고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여 인정을 받느냐가 문제다. 이 점에서 독일이 이탈리아에 비해, 싱가포르가 인도네시아에 비해 돋보인다.

사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논쟁이다. 우파든 좌파든 모든 정부가 그 규모를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유능한 정부와 무능한 정부의 구별이 더 유효하다. 이를 가르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돈의 씀씀이다. 포퓰리즘에 경사되어 무분별하게 공공 지출을 늘려왔는지 아니면 정책의 적합성과 효율성을 높여 돈을 제대로 썼는지, 지나보면 안다. 둘째는 정부 역할의 수월성이다. 든든한 경비원인지 미덥지 못한 경비원인지, 자상한 유모인지 거친 유모인지, 진취적인 상인인지 굼뜬 상인인지는 결국 수행 능력 평가로 드러난다.

이런 유능한 정부를 위한 노력이 바로 정부혁신이다. 정부혁신은 일하는 방식과 시스템의 혁신, 공무원 충원과 직무 혁신, 공공기관과 공기업 개혁 등을 포괄하는 과제다. 이전 정부들에서도 정부 2.0, 정부 3.0, 심지어 정부 4.0까지 말은 거창하고 요란했지만 의미 있는 정부혁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정부조직 개편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나마 이 정부 들어서는 정부혁신의 청사진은커녕 말조차도 듣기 어렵다.

모든 국정이 청와대에 집중되는 모습은 이전 정부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청와대 비서관들이 장관보다 국정의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더 심해졌다. 청와대가 온갖 인사에 다 관여하는 일도 그대로다. 인공지능과 융합의 시대에 부처 간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징후도 발견되지 않는다. 적폐청산 노이로제 때문에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는 더욱 강고해졌다. 혁신성장의 핵심인 교육개혁과 노동개혁, 규제개혁 등 복잡한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개혁들은 뒤로 밀리고 있다. 정부혁신 없는 혁신 성장이 과연 가능할까?

개인도 그렇지만 정부도 돈을 써 베푸는 일이 제일 생색이 난다. 새 정부 들어 기억에 남는 정책들은 대부분 돈을 풀어 ‘유모’의 역할을 강화하는 정책들이었다. 여당은 내년에도 ‘깜짝 놀랄 만한’ 재정 지출 확대를 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정부가 운이 좋은 정부이긴 하다. 이전 정부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양호한 재정 여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내 총생산 대비 재정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낮은 수준이고, 국가부채비율도 40% 정도로 일본(227%), 프랑스(123%)는 물론 독일(76%), 핀란드(75%)보다도 낮다.

하지만 이 양호함은 지켜가야 할 덕목이지, 빚이 많은 나라 수준까지 빨리 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1990년까지만 해도 균형 재정이었던 일본이 20년 만에 세계 최고 부채 국가가 된 것은 지난 20여년의 무분별한 재정 확대 정책에 기인한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국가 부채 양호 국가에서 불량국가가 되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혁신은 돈을 제대로 알뜰하게 쓰는 길을 안내한다. 정부가 재정을 대폭 확대하려면 정부혁신의 청사진부터 제시하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예의다. 정부 스스로 군살을 빼면서 현재의 재정 확대가 미래 세대에 지울 수 있는 부담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5년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방어할 수 있다. 정부혁신 없이는 든든한 경비원, 자상한 유모, 진취적 상인이 될 수도 없다.

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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