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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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전정희] 이야기가 필요해

입력 2018-06-16 04:10:01


제주 추자도 신양리 신양교회에서 동북쪽으로 2㎞ 지점에 ‘황경한의 묘’가 있다. 묘 앞쪽 갯바위에는 철제 십자가가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묘비에는 ‘순교자 황사영, 신앙의 증인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의 묘’라고 되어 있다. ‘황사영백서사건’의 황사영 부부의 아들 묘다.

황사영은 1801년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하자 선교사 파송 국가인 프랑스에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달라는 서한이 발각되어 대역부도 죄인으로 처형됐다.

그때 황사영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정난주와 두 살배기 아들 경한은 제주도 대정현 관노로 가게 됐다. 모자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정난주가 세력가 정약용가의 조카였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정난주는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 어린 예수를 안고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떠나는 마리아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호송관원과 함께 전남 강진에서 쪽배를 탄 모자는 추자도에 이르렀고 정난주는 관원에게 아들이 유배 도중 숨져 수장한 것으로 해 달라고 호소, 추자도 갯바위에 아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평생 노비로 살게 할 수 없어서였다.

그 추자도 사람들의 오래된 풍습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추자도 사람 황씨와 오씨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갯바위의 황경한을 오씨 성의 어부가 거두어 자식 삼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와 천주교는 이 ‘이야기’를 살려 추자도 올레길 코스의 황경한 묘 옆에 ‘모정의 쉼터’와 약수터 ‘황경한의 눈물’을 만들었다.

한국교회에는 이 같은 ‘이야기’가 없을까. 이야기보따리가 너무 많아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1885년 개신교 전래 이후 기독교의 역할을 지우고 근·현대사를 쓴다는 건 불가능할 정도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미시사회학이 역사에 반영된 건 당연하다.

한데 한국교회의 이야기는 맥락이 없다. 목회자 중심의 이야기에 집중해서다. 목사의 영적 능력만을 역사화하고 신화화하다보니 대중은 그 이야기를 흥미 없어 한다.

“나는 죽을 각오로 하나님께 매달려 이같이 교회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뭔가 생략된 강조는 메시지이지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이 겪은 사물과 사실 그리고 어떤 현상이 공적인 공간에서 공유가 돼야 비로소 공동체 이야기가 되는데 스토리텔러가 자기 메시지에 집중해 막연한 얘기가 되고 말았다.

이야기보따리를 꿰지 못하는 것은 개교회 중심의 목회 방식을 버리지 못해서다. 대중이 교회의 이야기에 자기동일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셨어요”라고 한다. ‘우리 교회’를 강조하지 않았다면 그 순교자는 목사 직분에 충실한 한 시대의 선각자이자 지식인, 공동체의 리더로 새김 된다. 따라서 신사 참배를 거부한 목사의 ‘행위’는 종교적인 이유가 전부가 아닌 양심 정의 진리가 된다. 이 현상은 곧 사회 이슈가 되고 공동체는 이 개인 이야기를 공유했을 것이다. 대중에게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는 다른 이야기다.

교회는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의’를 버려야 한다. 이야기의 핵심인 사물과 사실을 생략하지 말아야 한다. 맥락 없는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주일학교 교사가 이 두 요소를 빼고 가르칠 때 “선생님 재미 없어요” 하는 말을 듣는 요인이다.

사물과 사실을 아는 것은 곧 지식이다. 칼빈의 말처럼 지식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회가 식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지식 없이 이야기하면 애들 말로 ‘노잼’(재미없다)이다. 지식이 얕으면 개인적 추측과 억측을 쌓고 이에 몰리면 위엄을 찾고자 말씀을 끌어들여 탈출하려 한다. 신앙이야기도 공동체가 공감하는 지식의 공유가 되어야 한다.

참, 추자도에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빈민의 자모’ 서서평(1880∼1934·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의 이야기도 있다. 그에 대한 사물은 발굴 부족이지만….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2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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