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현대그룹 임원은 요즘 펼쳐지는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잘될까요?” 잃어버린 10년을 고스란히 견뎌온 그는 남북 화해무드가 가장 반가운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장 경계심을 갖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년 동안 남북경협 사업의 시작과 끝을 겪으며 기대 흥분 실망 좌절을 온전히 경험해서다.
1998년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북한 땅을 밟은 후 대북사업은 현대그룹의 정체성이 됐다. 그해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개성공단 개발·개성관광 등 대북사업에 의욕적으로 뛰어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0년 만에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방북 길이 완전히 막힌 후 지난 10년을 힘겹게 버텨 왔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 등을 매각했다. 남북경협 전담 기업인 현대아산은 10년 전에 비해 직원이 10분의 1로 줄었다. 그러자 다른 그룹에서 수군거렸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10년째 개점휴업 중인데 문을 닫지 않느냐고.
그는 그래도 희망과 위안은 있었다며, 2015년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이던 시절 예고 없이 현대그룹을 방문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문 대표는 회장도 안 만나고, 바로 사기가 떨어진 직원들을 찾아 위로했다. 언젠가 올 그날을 기다리며 여러분이 준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그는 “결국 남북 경제 통일이야말로 희망이 없다시피 한 우리 경제의 유일한 활로이고 새로운 성장 동력”이라고 말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한반도 미래의 결정적인 돌파구임을 이미 설파한 것이다.
2018년, 보면서도 믿지 못할 일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고, 북·미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다 극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전쟁을 일으킬 듯 으르렁거렸던, 신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늘 거짓말처럼 만난다. 북한과 미국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 때도 북·미 회담이 성사될 뻔했었다. 하지만 임기 후반이라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회담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초반이다. 다행히 문 대통령도 그렇다. 의지만 있으면 회담 결과를 추진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게다가 남·북·미 최고지도자들이 강력한 리더십과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방식이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 북·미 회담은 21세기 가장 극적인, 세기의 담판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기대처럼 한번에 술술 풀리진 않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봄 평양에서 열린 남북 합동공연의 첫 곡이 정인의 ‘오르막길’이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중략)/ 한 걸음 이제 한 걸음일 뿐.’ 가사처럼 북·미는 길었던 긴장관계를 멈추고 이제 한 걸음 내딛는다.
한국전쟁 후 한국 현대사가 완전히 달라졌듯 이에 못지않은 한반도 패러다임 전환 기회가 있다면 종전선언일 것이다. 이로 인한 남북 관계 개선은 상상하지도 못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남북경협이 남북 경제 통일로,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정치적 통일까지도 이어지지 않을까. 우리는 뭔가 멋진 일이 있어날 것 같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의 첫 순간을 목도할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 개성공단 폐쇄 등으로 현대그룹을 비롯한 남북경협 기업들이 큰 손실을 감수하며 힘들게 버텨 왔다. 설렘 반 의심 반으로 회담을 숨죽여 지켜볼 이들을 응원한다.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