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2층 52번 방은 고대 이란 전시관이다. 전시실 6호 진열장엔 유독 관람객들이 몰린다. 가로 23㎝, 세로 10㎝ 크기의 원통 모양의 진흙 토기 때문이다. ‘키루스의 서판’으로 소개되는 이 토기는 일명 ‘고레스의 실린더’로 불린다. 실린더에는 BC 539년 바벨론을 정복했던 페르시아 왕 고레스(키루스 2세)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쐐기문자로 기록된 토기에는 바벨론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사악함과 의롭지 못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고레스 왕이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는지 말하고 있다.
이 실린더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유명한데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고레스 왕과 그의 칙령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실린더 발견 이전까지 학자들은 에스라서 초반 유대인들의 귀환 조치를 담은 고레스 칙령을 무시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황제가 포로들을 풀어주며 종교의 자유를 선포할 만큼 정치적으로 지혜로웠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린더 발견 이후 에스라서에 대한 비판은 잠잠해졌다. 실린더 끝부분에 외국인 포로들의 사회적 신분과 자유를 선포하고 그들의 전통에 따라 예배할 수 있도록 귀향을 종용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렇다. ‘바벨론에 거주하는 자들에 관해… 나는 버려져 있는 그들의 땅에 구원의 손길을 베풀었다. … 나는 티그리스 강 저편에 있는 신성한 도시로 예전에 그들과 함께 존재했을 신상들을 되돌려 보냈으며 그것들을 위해 성소도 짓게 했다.’ 고레스 명령에 따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남쪽 유다 백성들은 70년 만에 자신들의 땅으로 귀환했다. 구약성경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1차부터 3차에 걸쳐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종교적 쇄신을 단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레스 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다. 그는 서아시아에서 중동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 리디아 제국과 신바벨론 제국을 멸망시켰다. 제국을 건설한 대왕 이미지와 달리 인자하고 관대한 왕으로 전해진다. 정복지의 문화와 언어, 종교를 파괴하는 대신 존중했다. 처음으로 노예제와 독재자의 압박을 폐지한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아버지’로, 그리스인들에게는 ‘훌륭한 입법자’로 불렸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여겼다. 구약성경 역대하서(36장)와 이사야서(44∼45장)에서는 그를 칭송한다.
고레스의 이름은 성경에 30번 이상 등장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고레스를 통해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성전이 재건될 것임을 예언했다. 고레스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유대인들이 믿던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고레스에게 능력을 주었다고 언급한다. ‘네(고레스)가 비록 나(하나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이사야 45:4∼5, 새번역)
이런 이유로 고레스 왕은 그동안 기독교 세계 안에서 당대 국가 지도자에 비견되며 해석돼 왔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오늘의 고레스’라고 믿는다는 지지를 보낸 바 있다. 지난달 14일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이전하면서 이 지지는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 일부도 트럼프 대통령을 고레스로 생각한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서다. 문자적이며 알레고리(은유)적 성경 해석은 위험하지만 트럼프가 고레스와 같이 70년 만에 우리 민족 통일의 물꼬를 터주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사용하신 것처럼 트럼프를 사용해 달라고 말이다. 한때 박근혜 전 대통령도 ‘통일 대박’ 발언으로 고레스의 반열에 오른 적이 있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되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이사야 45:21)
신상목 종교부 차장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