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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우 칼럼] 꼭 통일이 아니어도

입력 2018-06-06 05:05:04


시대가 변하면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통일에 대한 거부감 많아져
비핵화로 입구에 들어선 북한의 정상국가화는 개방으로 완성돼


1972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때 곧 통일이 될 것처럼 전국이 들끓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각급 회담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평양으로 올라가고, 서울로 내려오는 감동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통일 열풍이 또 한 차례 세차게 불었다.

남북 사이에 훈풍이 분다. 남북 정상이 한 달 새 두 번이나 얼굴을 맞대는 사상 초유의 경험도 했다. 뒤이어 고위급 회담, 군사회담, 적십자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의 회담이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정상회담부터 실무회담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분단 이후 남북 간에 지금처럼 여러 회담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적은 드물었다.

게다가 세기(世紀)의 만남이라는 김정은, 도널드 트럼프 간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북·미 관계도 역대 최상이다. 그럼에도 70, 80년대 불었던 통일 열풍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7·4 성명이 박정희 유신독재로 귀결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단발성 이벤트로 끝났던 학습효과 때문이리라. 북한이 언제 어떻게 또 돌변할지 모른다는 대북 불신감이 더해지면서 차분하게 지켜보는 분위기다.

생중계된 TV에 비친 김정은의 이미지는 그동안 대다수 국민에게 각인된 ‘철부지 독재자’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밝게 웃는 얼굴 속에 감춰진 심중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우나 정상회담 뒤 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핵 포기 발언이 크게 한몫했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회에 요구하는 건 체제 보장이다.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중국식도, 베트남식도 아닌 백두혈통이 세습하는 북한만의 체제를 인정하고 보장해 달라는 주문이다.

핵 폐기와 체제 보장의 빅딜이 성사될 경우 한반도와 그 주변에는 평화가 온다. 그러나 통일은 멀어진다. 김정은 체제를 보장하는 건 그 기간 통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가 독일식 흡수통일을 원할 리 없다. 더욱이 무력에 의한 베트남식 통일이나 평화적으로 통합했으나 끝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전으로 치달은 예멘식 통일은 남과 북의 길이 아니다. 남과 북이 동등한 조건으로 하나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통일 방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꿈에서도 일어나기 어렵다. 남과 북이 줄곧 유지해온 자신의 체제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건 자명하다.

분단 이후 통일은 당위였다. 수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들은 이에게 통일은 분명 ‘꿈에도 이뤄야 할’ 당연한 명제였다. 시대는 변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제 앞가림하기조차 버거운 청춘에게 통일은 먼 나라 얘기다. 지난 1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뢰로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연령이 낮을수록 ‘통일의 필요성’에 부정적이었다. 20대의 경우 38.9%만이 통일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봤다. 60대 이상의 71%와는 확연한 차이다. 자기희생이 따르는 통일에 대해서는 찬성률이 뚝 떨어진다. 20대는 8.0%만이 ‘통일을 위해서라면 내가 좀 못살아도 된다’고 응답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현상은 전 연령대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찬성률이 가장 높은 60대 이상에서도 15.8%에 그칠 정도로 내 삶의 질이 떨어지는 통일에 대한 거부감은 심했다. 통일이 당위가 아닌 선택이라는 얘기다.

통일이 아니어도 공존의 길은 있다. 양안 모델이다. 중국과 대만은 각자 자신의 정체(政體)를 유지하면서 ‘삼통사류(三通四流)’한다. 3통은 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우(通郵)를, 4류는 경제교류 과학교류 문화교류 체육교류를 뜻한다. 양안 간에는 매일 100여편의 직항 항공기가 오간다. 또 매년 300만명 안팎의 중국인이 대만을 방문한다. 대만의 최대 해외 투자처는 중국이다.

삼통사류는 중국 주도로 이뤄졌다. 양안 교류는 중국보다 대만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줬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대만은 친중 성향의 국민당 정권은 물론 반중 독립 성향의 민진당 정권에서도 교류확대 정책을 꾸준히 계승, 발전시켜 오고 있다. 통일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남북이 함께 추구해야 할 모델이다. 비핵화로 입구에 들어선 북한의 정상국가화는 개방으로 완성된다. 개방은 김정은에겐 양날의 칼이다. 번영을 부르는 최선의 수단인 동시에 체제 유지의 가장 큰 위협이기도 하다. 북·미 간은 물론 남북 간에도 불가침조약에 준하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보수 정권에 상관없이 유지, 계승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를 신뢰할 수 있어야 북한이 개방의 길로 나선다. 그리고 그 길은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길과 통한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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