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은 소명(또는 부르심)이라는 단어와 함께 놓일 때 이해하기 쉽다. 소명은 왕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사명으로의 부름을 뜻한다. 사명은 소명을 받은 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나 책임, 즉 소명 받은 자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 자녀로 부름 받은 이들은 누구나 소명을 받았다. 그들에겐 저마다 사명이 맡겨져 있다. “여러분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같은 말은 소명과 사명의 또 다른 설명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만 보면 사명이라는 게 제법 거창해 보인다.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헌장이 제정된 1968년만 해도 개발독재가 한창인 때였다. 나와 가족보다는 나라와 민족이 우선이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 출신인 이영표는 5년 전 은퇴했다. 서른일곱 살 나이에 인생의 전반전을 마친 그는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은 뭘까’를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이씨는 최근 펴낸 ‘생각이 내가 된다’(두란노)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한 깨달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너의 사명은 누군가의 아들로서, 세 딸들의 아빠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누군가의 친구와 이웃으로서, 축구 선수 이영표로서, 그리스도인 이영표로서 오늘 허락된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창하거나 특별하지도 않은, 지금 여기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과업들이 곧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의 깨달음은 존재와 현재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농사꾼 이규실(80)씨가 ‘거사’를 맡게 된 건 친구 때문이었다. 10여년 전, 그의 친구는 부도 직전의 작은 출판사를 맡아 달라고 그에게 간청했다. 자초지종을 듣던 그는 덜컥 출판사를 인수하기로 했다. 성경을 출간한다는 얘기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이후 가시밭길이 시작됐다.
그가 맡게 된 출판사는 주석 성경을 발행하는 영세업체였는데, 직전 소유권자와 저작권 분쟁을 겪어야 했다. 발간 준비를 마칠 때쯤에도 문제가 터졌다. 한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성경이 개역한글판에서 개역개정판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발간을 앞둔 성경은 개역한글판이었다. 구절마다 바뀐 현대식 표현 등에 주석을 다시 달아야 할 판이었다.
전문적인 신학 지식은커녕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던 이씨는 난감했다. 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놓은 터라 포기할 수 없었다. 성경과 사전, 옥편을 펴놓고 뜻을 풀어 주석을 달았다. 각 장에 관련된 그림과 한자도 넣었다. 그리고 지난달 1700페이지가 넘는 ‘등불성경’(로뎀서원)을 내놨다. 칠순 무렵에 시작한 일이 팔순을 맞아 끝을 본 것이다.
일전에 만난 이씨는 작은 체구에 구릿빛 얼굴을 지닌 시골 할아버지 같았다. 그는 “일자무식쟁이가 수지타산도 안 맞는 일을 했다”며 겸연쩍어했다. 이런 말도 했다. “베드로가 생각나더라고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그물 버리고 따라간 베드로요. 이 일을 안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내 인생의 사명 같았습니다.”
예수의 부르심(소명)에 순종하면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간 어부 베드로, 쌀농사를 짓다가 인생 늘그막에 말씀(성경) 농사꾼으로 변신한 이씨의 삶. 둘의 공통분모는 사명일 것이다. 저마다의 사명은 그걸 완수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6월은 사명의 달이다. 13일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서는 전국 2292개 선거구에서 4028명의 주민 대표가 뽑힌다. 선거에 출마한 9363명의 후보자들은 저마다 ‘이게 나의 사명’이라며 표밭을 훑고 있다. 투표는 유권자로서의 사명일 것이다. 선거 이튿날은 러시아 월드컵 개막일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16강 달성’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안고 있다.
아무래도 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날은 12일이 될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장에 들어서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