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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손병호] 안보 거간꾼 노리는 김정은

입력 2018-05-31 05:10:02


최근 북한과 미국이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한의 막말 성명을 문제 삼아 회담을 취소했다가 북한이 꼬리를 내리면서 복원됐다.

명분은 막말이었지만 근본적 이유는 북·미 협상 과정에서 비핵화 이후 구축될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구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구도가 미국에 유리하게 협의되다 상황이 달라지자 판깨기 위협으로 반전을 꾀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 전 중국의 개입을 누누이 지적했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한 뒤 달라졌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것도 그런 배경이었을 것이다.

북·미 협상에서 주한미군 철수 또는 주둔 규모의 문제, 한반도 주변에서 남기거나 철수시킬 전략 자산(무기)의 종류, 종전선언의 주체 문제, 불가침조약 체결 문제 등은 북한의 비핵화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들이다. 이는 북한 체제 보장과 직결돼 있는 것은 물론 중국의 안보나 향후 한반도의 지정학적 질서를 좌우하는 데에도 핵심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6·12 회담 때 모든 게 다뤄지지 않더라도 향후 추가 협상과정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의 계산이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비핵화 과정에서도 북한이 동북아의 지정학적 구도에서 핵심 역할을 차지하겠다는 게 김정은의 의도로 보인다. 어쩌면 벌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안보 거간꾼’으로 자리매김했는지 모른다. 그가 먼저 제안해 두 번째 중국을 방문한 것도 그런 역할의 일환이다. 미국과 너무 가까워지고 있고, 또 지정학적 구도가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걸 우려하는 중국을 달래기 위해 그는 급히 방중했다.

그런데 북·미 회담이 복원되자마자 중국은 ‘차이나 패싱(중국 배제)’은 안 된다고 다시 안달하고 있다. 회담 복원으로 김정은이 다시 미국 쪽으로 기울고 있고, 북·미 협상도 미국의 요구가 더 많이 반영될 것이란 우려에서다. 그러자 김정은은 방미길에 오른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베이징에 하루 체류시키며 중국을 재차 다독거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미 협상의 핵심은 북한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 편을 좀 더 들어주느냐와, 비핵화 과정에서 북한이 폐기할 핵과 탄도미사일 등 전략무기의 수준과 규모 등이 될 것이다.

첫째, 누구 편을 더 들어주느냐 문제에 있어선, 북한은 1992년 한·중 수교의 배신감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중 수교 이후 북·중이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만 8년이 걸린 사실을 떠올리면 북한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에 베이징을 방문하고서야 불편한 관계를 수습했지만 북한이 지금도 그 기억을 잊을 리 없다. 북한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주한미군 주둔 문제나 한반도 주변의 미 전략자산 유지 여부, 종전선언 주체를 정하는 일 등에 있어 중국에 26년 전의 일을 되갚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비핵화 과정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어느 정도의 시한을 두고 없앨지는 북한의 체제안전과 함께 안보 거간꾼 역할 유지와 직결돼 있다. 북한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구도에서 유효한 안보 플레이어로 남을 수 있는 수준까지만 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일부 핵무기는 조기 폐기에 동의하더라도 다른 무기들은 최대한 지연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미·중 사이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줄타기 외교로 이익을 취할 것이다. 또 일정 수준의 무력과 억제력을 보유함으로써 군사적 존재감을 유지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북·미 회담 이후의 지정학적 역할을 모색하는 것처럼 이제 남한도 향후 한반도에서 어떤 안보적 롤을 맡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북·미가 밀착하는 상황에서 어떤 존재로 남을지를 말이다.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 구도에서 무지렁이가 되진 말아야겠다.

손병호 국제부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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