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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의 지금, 미술] ② 정직성의 ‘기계 미학’

입력 2018-05-30 05:05:03

 
사진=최현규 기자
 
정직성 작가의 기계 연작 가운데 하나인 ‘201443’(162×130.3㎝, 2014년 작 가운데 43번째 작품이란 뜻).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를 섞어 시원한 붓질로 그렸다. 작가는 “기계를 한껏 추상화했는데도 남편이 ‘이건 마티스 엔진, 저건 소나타 엔진을 그렸네’라며 알아맞힌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작가 및 서울대미술관 제공
 
또 다른 기계 연작인 ‘201759’(위)와 작가 생활 초기에 인기를 끌었던 연립주택 시리즈 ‘200915’. 작가 및 서울대미술관 제공


통계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혼과 재혼은 주변에 흔하다. 미술가라고 비켜갈 리 없다. 그녀, 두 번 결혼했다. 차이가 있다면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페이스북에도 ‘나의 연애 잔혹사’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쓴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상처도, 심각한 무엇도 아닌 과거가 되게 만들어버리는 여성미술가 정직성(42).

정직성이란 이름 석자를 처음 각인한 건 지난해 겨울 대구 리안갤러리에서였다. 전시명 ‘기계 더 메카닉(The Mechanic)’. 자동차 내부의 구불구불한 기계로만 채워진 캔버스가 화이트 큐브를 점령한 광경은 낯설고 강렬했다. 소재도 그랬지만, 대상에 대한 해석이 통념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금속성의 자동차 부품인데도 인간의 내장처럼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듯했다. 무채색으로 칠해진 기계와 기계 사이의 남루한 빈 공간, 마땅히 어둡고 칙칙한 색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핑크 보라 파랑 주황 초록 등 원색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흐르듯이 속도감 있게 그은 붓질과 밑색의 반란, 거기에서 생에 대한 낙관과 건강한 에너지, 알 수 없는 환희가 흘렀다.

‘기계=남성’이라는 젠더 고정 관념 탓에 처음엔 작품 소재만 보고 남성 작가의 전시라고 생각했다. 화랑 대표로부터 작가 이름을 전해 듣고는 전에 그녀를 대면한 기억이 퍼뜩 났다. 두꺼운 평붓을 사용한 붓질의 분방함이 낯익더라니. 2016년 여름, 서울대미술관 10주년 기획전 ‘지속가능성을 묻다’전에 초대된 8명에 포함됐던 작가였다. 그땐 대표작의 하나인 공사장 시리즈와 4대강 사업에 따른 녹조현상을 추상화처럼 그린 신작이 출품됐었다.

그때 작가만 봤다면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아이와 함께였다. 세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엄마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전시 개막일엔 흔치 않은 풍경이라 잔상이 오래갔었다.

정직성은 올해 다시 ‘기계 더 메카닉(The Mechanic)’전(∼6월 10일)을 갖고 있다. 서울 성동구 장안평 자동차산업 종합정보센터 내 갤러리 JAC에서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나 그때 얘기를 꺼냈더니 “아기 낳고 한동안 작업을 못 하다가 다시 작업을 재개한 전시였다. 오래간만에 공식 행사에 참가한 거였는데…”라며 배시시 웃었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다시 결혼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 자동차 기계 그림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결혼에서)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래 입었던 거 같다”는 그녀는 “가정폭력이 있었는데도 10년이나…”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둘 다 작가였음에도 여성인 자신은 보조자로 살아야 했던 불평등한 상황도 힘들었다.

5년 전 만났다는 지금 남편의 어떤 점이 좋으냐 물었더니, “잘생겼다”며 다시 배시시 웃는다. “나훈아처럼 (부리부리) 잘생긴” 남편은 요리도 잘하고, 배려심도 많단다. 강의 나가는 아내를 위해 드립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주기도 한다. 전시명의 일부인 ‘메카닉’은 영어로 자동차 정비사를 뜻한다. 20년 경력의 남편이 온갖 작업공구로 고쳤을 엔진과 머플러 같은 기계 장치, 번쩍 들어 올린 차량의 밑바닥…. 남편의 세계가 자연스레 화폭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남편에게 바치는 헌사다. 작가는 이를 꼼꼼히 그리는 게 아니라 추상화를 그리듯 형태를 뭉갠다. 원색의 밑색에서 언뜻언뜻 환희가 느껴지는 것은 충만한 행복감의 표현일 수 있겠다 싶었다.

“제겐 정비공들이 환자의 장기를 고치는 의사처럼 느껴져요.”

과감한 붓질로 그려낸 자동차 기계는 회색톤임에도 차갑지 않다. 역동성과 생명력이 넘친다. 블루칼라 업종에 대해 사회가 갖는 고정관념이나 낡고 지저분한 이미지 따윈 없다. 이는 정직성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며 작가로서 갖는 계급의식의 발로다.

계급적 자각이 회화 세계를 관통한다. 40번 넘게 이사할 수밖에 없었던 삶에서 나온 ‘연립주택’ 시리즈와 ‘공사장’ 시리즈, 촛불집회를 매화로 표상한 ‘겨울꽃’, 그리고 지금의 ‘기계’ 연작까지.

“1980년대 민중미술은 추상계열의 엘리트 미술인 단색화에 반발해 구상미술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기계를 추상화시켜요. 엘리트 미술의 형식을 빌려서도 충분히 민중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육아와 가사를 하며 일하는 워킹맘의 고충은 미술가인 그녀라고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지난해에만 3번의 개인전을 했다. 왕성한 활동 때문인지 후배 여성 미술가들이 자주 조언을 구해온다고 한다.

“스위치 기법을 강조합니다. 스위치를 껐다 켜듯 엄마 모드에서 작가 모드로 재빨리, 완전히 전환해야 하는 거죠. 꼼꼼히 그리는 기법으로는 오래 버티기 힘드니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도 해요. 최고의 질이 아니라 지속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일필휘지 붓질은 ‘엄마 화가’로 버텨내기 위한 생존법이기도 한 셈이다.

정직성은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녀가 2004년부터 써온 작가명이다. 빌리 조엘의 팝송 ‘어니스티(Honesty)’를 한국어로 직역한 고 박이소 작가의 패러디 작품 ‘정직성’에서 땄다. 정직하게 세상과 대면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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