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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포커스-홍관희] ‘민족자주’로는 北核 못 막아

입력 2018-05-28 05:05:03


지난주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해 세계를 놀라게 한 뒤 북한의 전례 없는 저(低)자세 화해 제스처에 마음이 흔들려 회담 재개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 와중에 주말인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과 판문점에서 제2의 깜짝 정상회담을 가졌다.

정세 변동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북한이 과연 비핵화 의지가 있는가, 또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초 북·미 회담 취소를 결단한 것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해서다. 회담 재개 의사를 밝힌 뒤에도 그는 북한 비핵화 여부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CVID(완전한 비핵화) 원칙과 강력한 경제제재 및 군사적 압박 지속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비핵화 진의(眞意) 여부다. 지금까지의 객관적 증거들은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슬로건 뒤에 숨어 여전히 핵 보유를 지속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입증해준다. 우선 한반도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 뒤에도 북한은 아직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비핵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4·27 판문점 회담에서도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했고, 김정은은 핵에 관해 한 마디도 언급 안 했다.

5·26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27일 기자회견에서 남북 정상이 (민족자주에 입각한) 판문점 선언의 조속한 이행을 다짐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합의했다고만 밝혔다.

북한 김계관·최선희 등 외무성 관리들은 앞서 ‘핵 불(不)포기, 미국과의 핵 대결’을 주장해 미국의 의구심을 촉발시켰고, 특히 최선희 부상의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에 대한 ‘공개적 적대감(hostility)’ 표출은 신속한 CVID에 대한 명백한 거부에서 나온 것이다.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1차 실무회담에 북한 측은 이유 없이 불참했고, 24일 실시된 풍계리 핵시설 폭파도 전문가들이 배제돼 ‘위장 쇼’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폭파 후에도 미국과의 핵 군축을 거론했다.

문재인정부가 민족자주 슬로건과 김정은의 매력 공세에 의존해 검증되지 않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사를 신뢰하고 이를 미국 측에 전달하면서 미·북 정상회담을 독려하는 것은 분명한 정책적 과오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같은 가치중립적 표현을 내세워 북한의 대남 전략 곧 ‘체제 보장, 적대시 정책 중단’ 요구를 이해하려 하면서 동맹국의 원칙적 북핵 전략을 완화하려는 것은 결국 안보와 동맹을 위협한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우리 안보에 미치는 위협을 인식한다면 희망 섞인 한 가지 시나리오에만 집착하지 말고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전략적 치밀함을 갖춰야 한다. 안보 정책 실패는 국가의 흥망과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북핵의 칼날은 대한민국을 겨누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북·안보 정책 전반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도달했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안보의 보루인 한·미 훈련을 축소·중단하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추진해 유엔사령부 해체 및 미군 철수 논란을 자초하는 것은 결국 김정은 정권을 ‘춤추게 할 뿐’이다(신임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지명자).

김정은이 비핵화에 진정한 전략적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핵 협상은 성공하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을 인질로 삼아 미국의 예봉을 무력화하면서 남남갈등을 극대화하려는 북한의 대남 전략이 성과를 볼 수도 있다. 평화협정 체결 이후 ‘민족자주·우리민족끼리’에 입각한 남북 연방제 내지 일국양제 평화통일 기운이 표면화되고, 미군 철수로 남한에 힘의 공백이 가시화될 경우 한반도판 월남 패망은 물론 예멘과 같은 내란의 비극을 자초할지도 모른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말했다. “과거는 기억할 뿐이고, 현재는 실재의 표상이며, 미래는 실로 불가측하다.”

홍관희(성균관대 초빙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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