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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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김혜림] LG家의 장자 승계 원칙

입력 2018-05-23 05:10:02


“경영 환경이 어렵다고 사람을 안 뽑거나 함부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 하겠다.”

기업가로서 올곧은 신념을 가진 이였다. 73세란 아까운 나이에 지난 20일 세상을 뜬 LG그룹 3세 경영자 구본무 회장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거창한 서사보다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고인의 됨됨이를 더 잘 보여준다. 고인은 현역 입대해 보병 병장으로 제대했다. 재벌 2, 3세들 중에는 매우 드문 경우다. 저녁 자리가 늦어지면 기사를 들여보내고 택시 타고 귀가했다고 한다.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대기업 총수와 그 가족들의 ‘갑질’ 횡포가 겹쳐지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마지막 가는 길도 예사롭지 않았다.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맞았다. ‘번거롭지 않게 소박한 장례를 치르라’는 유지를 남겨 비공개 가족장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고인은 어지러운 요즘 세상에 만나기 쉽지 않은 어른이었다. 정도 경영의 모범으로 존경받는 고인에게 아쉬움이 있다. LG그룹을 이끌 4세 총수로는 구광모 LG전자 상무가 꼽히고 있다. 망자의 가족사를 들추는 것 같아 송구스럽지만 세상에 드러난 일이니 좀 살펴보겠다. 구 상무는 고인의 친동생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고인은 친아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구 상무를 2004년 양자로 들였다. 딸이 둘이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2004년이면 호주제 폐지가 한창 진행되던 때다. 호주제는 가계 승계에서 남성을 우선하는 여성 차별적 제도로, 2005년 결국 폐지됐다. 고인이 딸에게 경영수업을 시켜 총수로 키우는 용단을 보여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크다.

고인은 두 딸을 총수 승계는 물론 경영에서도 소외시켰다. 고인뿐만 아니라 LG가(家)는 전통적인 장자 승계 원칙을 지키면서 집안 여성들의 경영 참여를 배제하고 있다. 경남 진주 양반으로 유교 문화를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부장적 의식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사업보고서 공시를 보면 LG전자의 경우 총 319명의 임원 중 여성이 6명(1.9%)뿐이다. 경쟁사인 삼성전자는 1043명의 임원 중 여성이 58명(5.6%)이다. 역시 적은 숫자지만 LG에 비해선 훨씬 많다. LG전자와 LG생활건강 등은 ‘만년 2위’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갖고 있다. 딸들의 경영 배제 원칙의 결과는 아닐지 되짚어볼 일이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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