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말하지 못하는 승자

입력 2018-05-23 05:05:03


미투 운동으로 인해 묻힐 뻔한 성폭력이 세상에 드러났고, 특히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해 많은 이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커다란 용기를 갖고 미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대단하지만, 상대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초라함을 느끼는 경우를 본다. 피해자라고 모두 미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에, 약자와 약자 간의 간극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첫째로 가해자를 찾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26년 전쯤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어 언제라도 가해자를 혼내주고 싶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둘째로 피해자로서 이런 사실을 밝혀서 얻는 손해가 가해자에게 끼치는 손해보다 더 크다며 마음을 접는 경우도 있다. 고민 끝에 미투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인은 가해자가 이미 충분히 악명 높은데 괜히 자기 이름만 들먹여지는 손해가 싫다고 했다. 물론 이런 생각에는 세상이 정의롭지 못해 가해자가 결국 충분히 벌 받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다.

피해 사실을 밝혔을 때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걱정해서 침묵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가슴 아프다. 특히 친척이나 가족이 가해자일 경우, 이런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투병하는 어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외가 쪽 친척이 자신에게 저지른 성폭력을 알리지 못한다. 어머니가 심한 죄책감과 분노를 느껴서 건강이 악화돼도 죄송한 일이고, 만에 하나 다 지나간 것을 왜 이제야 말하느냐며 힐난해도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동성 간 성폭력이나 남성 피해자의 경우에도 미투 하기 더 어렵다.

침묵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만 승자가 아니다. 침묵한다고 앞에 나서서 말하는 자에 비해 열등감이나 박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정신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드러내서 많은 사람의 위로를 받는 것만 치유는 아니다. 설령 미투를 못해도 그 사건 때문에 생긴 무력감, 죄책감, 세상에 대한 이질감을 극복해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열심히 가고 소중한 하루를 살고 있다면, 그것은 트라우마를 이긴 것이다.

하주원(의사·작가)

삽화=전진이 기자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