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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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승욱] 트럼프 어디까지 보장할 수 있나

입력 2018-05-22 05:10:01


2011년 3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결의안 1973호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결의안에는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리비아 국가원수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유엔 회원국의 군사행동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다수결로 통과됐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기권했다. 10개 비상임이사국 중 독일 인도 브라질도 찬성하지 않았다. ‘지상군 주둔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민을 보호한다’는 문구가 쟁점이었다. 사상자 규모로 보면 비행금지구역 설정 정도로 끝냈을 기존 결의안과 강도가 달랐다.

국제법적으로 어떤 나라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다른 나라가 무력을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는 이후 전개될 카다피의 학살을 막는 게 무엇보다 급하다는 점을 인정해 국제사회의 무력사용을 허용했다. 명분은 2005년 유엔 총회에서 191개국 정상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국민보호책임(R2P·responsibility to protect)에서 가져왔다. R2P란 한 국가가 자국민을 상대로 집단학살, 인권유린, 인종청소 범죄를 저지르면 국제사회가 보호에 나설 수 있다는 개념이다.

3일 뒤인 20일 나토 연합군은 ‘오디세이의 새벽’ 작전을 시작했다. 토마호크 미사일 수백발이 트리폴리에 쏟아졌다. 프랑스의 라팔·미라지 전투기에 이어 미국의 B2 스텔스기가 가세했다. 반군의 거점 벵가지 함락을 눈앞에 뒀던 카다피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는 5개월 뒤 고향으로 달아나다가 반군에게 붙잡혀 살해됐다. 사체는 정육점 냉동창고에서 일반에게 공개됐고, 모욕적으로 훼손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국제사회의 개입은 42년 동안 리비아를 통치한 카다피를 6개월 만에 처참하게 몰락시킨 것이다.

공습을 피해 고속도로 배수관에 숨었을 때 카다피는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선언과 미국과의 협상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중동 전문가들은 리비아가 핵과 탄도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공습을 주도한 프랑스는 훨씬 신중했을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지난 13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한의 핵, 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모든 WMD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카다피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볼턴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인터뷰 말미에 북한의 인권문제를 들고 나왔다. 인권유린은 R2P 작동 사유다. 논리적으로는 비핵화를 이루더라도 선제공격이 가능하다. 볼턴에게 ‘리비아 모델’은 2003∼2005년 협상을 의미했지만 김정은에게는 2011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2011년 오디세이의 새벽 작전에서 미국은 앞에 나서지 않고 나토 회원국에 부여된 임무만 수행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예상보다 북한의 반발이 거세지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볼턴의 발언을 수습하는 게 지금의 모양새다. 트럼프는 볼턴과는 달리 리비아 모델을 북한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리비아를 초토화(decimated)했지만 김정은은 계속 나라를 운영할 것(would be running his country)”이라고 말했다. 볼턴과의 예정된 면담을 취소하는 제스처까지 보였다. 대단한 쇼맨십이지만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는 뚜렷하다.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리비아가 속한 북아프리카와 전혀 다른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감안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북한의 내부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다. 구소련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들고 나온 이래 많은 사회주의 국가가 민주화라는 홍역을 치렀다. 그중에는 처참한 정권 붕괴가 여럿 있었지만 체제를 유지하며 경제를 살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착륙 여부는 미국을 비롯해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북한 스스로의 몫이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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