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목표가 북한의 생존과 자신의 장기집권이라고 가정해본다면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을 것
남북이 미·일·중·러와 함께 6자 서밋을 열고 한반도가 역내 평화의 축으로 떠오를 날을 상상해보자
고백하건대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핵 문제는 일사천리로 해결될 수 있겠다고 봤다. 흔한 말로 갈 길이 멀어 장애가 있을 수 있겠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속으론 한반도에 순풍이 불고 있다고 확신했었다. 뒤이어 지난 10일 북·미 정상회담의 일정과 장소도 발표됐다.
하지만 30년 묵은 북핵 문제는 녹록하지 않았다. 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개인 담화로 미국이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면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놨다. 그날 예정됐던 남북 고위급 회담도 무기 연기됐다. 북한의 일침이다.
원인으로 우선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꼽힌다. 매파인 그는 마치 패전국 북한의 전후 처리를 거론하듯 연일 목소리를 높였었다. 불만스러웠던 북한으로서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존재감을 강조할 필요도 있다고 보고 강공세를 편 게 아닌가 싶다.
‘북한이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비난도 나온다. 4·27 정상회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이들만의 지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북한의 일침은 되레 긍정적이다. 판문점 선언으로 막연한 낙관론에 취해 있던 이들에게 북핵 문제의 어려움을 다시 환기(喚起)시킬 수 있어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신중 모드로 돌아섰다.
바람직하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치밀하고 차분하게 추진돼야 할 과제다. 아무튼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그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될 평화체제 논의도 큰 틀에서 볼 때 예정대로 진행될 터다. 지금 변화의 바람을 타지 못하면 한반도는 영영 전쟁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30년 전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선언)’을 발표했다. 골자는 남북 교류·교역·협력, 이산가족 서신교환·방문 등이다. 또 남한과 소련·중국, 북한과 미국·일본의 교차 수교도 거론됐다. 이에 한국은 90년 소련, 92년 중국과 각각 수교했고 91년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뤘다.
반면 북한은 미·일과 수교할 수 없었다. 북한이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87년 11월)을 일으켜 테러지원국으로 지목된 탓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고립된 북한은 엉뚱하게도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미국의 정찰위성은 88년 북한 영변 원자로 부근에 건설 중인 재처리 시설을 포착했다. 바로 북핵 문제의 시작이다.
이후 북핵 문제는 이를 풀어가려는 방법론에서 당사자인 한·미 간 부조화가 반복되면서 해결은커녕 점점 악화됐다. 미국 민주당 정권은 북핵 문제를 대화로 풀려고 했지만 공화당 정권은 강공세로 일관했고, 한국 진보정권은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으나 보수정권은 소극적이고 무심했다.
빌 클린턴 정부(93. 1∼2001. 1)와 김영삼정부(93. 2∼98. 2), 김대중·노무현정부(98. 2∼2008. 2)와 조지 W 부시 정부(2001. 1∼2009. 1), 버락 오바마 정부(2009. 1∼2017. 1)와 이명박·박근혜정부(2008. 2∼2017. 3)의 조합은 대북 정책에서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북핵 해법을 둘러싸고 어렵게 마련된 숱한 합의들조차 제대로 관리·조율되지 않았다.
다만 문재인정부(2017. 5∼)와 트럼프 정부(2017. 1∼)의 조합은 좀 다른 듯하다. 미국 우선주의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 보수정권과 달리 미국의 이익, 아니 자신에게 득이 된다고 판단하면 뭐든 밀어붙이는 인물이다. 여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를 제기했고 문 대통령은 그 내용을 확인했다.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다.
김정은의 진정성에 의구심도 들지만 그의 목표가 북한의 생존과 자신의 장기집권이라고 가정해본다면 그에게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핵·미사일만 고집해선 전쟁 가능성만 고조될 뿐 해법은 못 된다. 남은 선택은 핵과 미사일을 비싸게 팔아넘기는 것이 될 터다.
흥정은 시작됐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이제는 흥정을 탓하기보다 흥정의 성공을 바랄 때다. 흥정의 좌절은 전쟁이다. 흥정에는 당장 밑지는 이가 있기 마련이나 우리는 한반도 전체가 득을 보는 상태를 상상하면 좋겠다. 더 깊고 멀리 보자. 탈냉전으로 가는 막차를 탄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무한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섣부른 기대가 아니라 판이 바뀌고 있다는 긍정의 시각이 절실하다. 우리 내부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도 한반도의 극적인 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들의 참여는 어렵사리 마련된 변화의 역류를 막아줄 것이다. 남북이 미·일·중·러와 더불어 ‘6자 서밋’을 매년 열고 한반도가 역내 평화의 축으로 떠오를 날을 상상해보자. 좀 더 지혜롭게.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