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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포커스-김재천] 트럼프는 지금 ‘업’되어 있다

입력 2018-05-21 05:10:02


“구멍이 송송한 스위스 치즈 같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구멍투성이라며 비판했던 이란 핵 협정에서 결국 탈퇴했다. 북한과 정상회담 준비에 분주한 와중에 내려진 결정이라 대북 핵 협상에 주는 함의에 관심이 가고 있다. 실제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란 핵 협정 탈퇴가 “김정은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란의 산업용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제한이 2025년부터 풀리기 시작해 2030년에는 완전히 사라지는 일몰 조항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북한에 군사용뿐 아니라 산업용 핵 프로그램의 영구적 폐기를 요구할 것임을 시사한다. 핵 협정이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다른 나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했는데, 북한에 중장거리탄도미사일 및 생화학무기 폐기까지 종용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가 입수한 이란의 과거 핵무기 활동 기록 역시 탈퇴의 빌미가 됐는데, 북한에 핵·미사일 활동 기록의 철저한 신고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측불허 트럼프에게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트럼프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이 시점에 이란 핵 협정 탈퇴를 결정했다기보다는 대북 정책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탈퇴를 감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부터 이란 핵 협정 탈퇴를 공언했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는 핵 협정을 두 차례 인증하며 탈퇴를 미루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불인증으로 돌아서며 탈퇴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연초만 해도 선뜻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있었다. 국내외의 반대 여론, 특히 핵 협정의 당사자로 참여한 유럽 동맹국의 반대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들의 반대는 국제원자력기구뿐 아니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까지 인정했듯 이란이 핵 협정을 준수하고 있고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지켜보며 이란판 최대 압박 캠페인을 벌인다면 이란도 굴복시켜 더 좋은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지금 상당히 ‘업’되어 있다.

트럼프가 북한에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은 사실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미국의 전문가 사이에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다.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게임은 끝났고, 북한이 이겼다(Game is over, and North Korea has won)’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다수의 전문가들이 비핵화보다 북한의 도발 억지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오죽하면 ‘냉전의 전사’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마저 북한 비핵화는 ‘실패한 개념(lost cause)’이고 북핵 동결조차 현실성이 없다고 했을까. 그러나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방위적 최대 압박 대북 정책을 구사했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이 핵 군축 대화를 제안할 것은 예상했지만 비핵화 협상에 제 발로 나온 것은 트럼프의 공이 크다. 트럼프와 적대 관계에 있는 CNN방송조차 “트럼프가 칭찬받아 마땅하다(Trump deserves the credit)”며 인정하는 부분이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트럼프로 하여금 ‘힘에 의한 평화’ 원칙이 통한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국제사회 모두가 최대 압박 정책에 동참했기 때문이고, 국제사회가 동참한 이유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도를 넘어섰고 전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규범적 합의가 선행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힘이 두려워서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규범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진행될 트럼프의 이란판 최대 압박 정책은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란 핵 협정 탈퇴는 당장 북한을 압박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북한 비핵화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북한이 핵 협정에 서명하더라도 훗날 “너희도 그랬는데” 하며 탈퇴해도 미국은 별로 할 말이 없다.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어깃장을 놓는 이유도 국제사회의 여론이 마냥 미국 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수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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