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위기와 고난은 뚜렷한 기준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무작위로 발생할 수 있어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치명적인 질병과 소중한 사람의 죽음, 사업 실패와 재난 사고 등의 위기를 만날 때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억울한 심정의 포로가 된다. ‘성장하기 위해 인생의 시련이 필요하다’라거나 ‘고난 뒤에 축복이 온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고난이 아무리 삶에 새로운 단계를 끌어낸다 해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미성숙한 상태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고난과 성장’ 사이엔 묘한 변수가 있다. 고난 그 자체는 절대 이롭지 않다. 늘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시련 앞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긍정적 창조적으로 반응해 인격을 성장시킬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반응해 발전을 저해할 것인가. 어떤 반응은 역사 가운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고, 어떤 반응은 실패한 삶으로 끝날 것이다. 고난 자체가 축복이며 은혜라기보다는 이에 대한 용기 있는 반응이 창조적 에너지를 낳는다.
스위스 제네바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1975년 ‘의학과 위생학’이란 학술지에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가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300여명의 지도자가 모두 어린 시절 부모를 잃거나 사생아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정서적 좌절로 인해 생긴 불안정이 아이들에게 이례적인 권력 의지를 불러일으켰다는 ‘정치적 권력 의지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끌어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경이 창조적인 인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상실만큼 큰 시련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엄청난 상실의 아픔을 겪은 아이 중에서 지도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인생의 상실과 고난이 창조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학자들은 이에 대해 ‘관계와 원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위인들의 과거사에서 대부분 큰 시련이 발견됐어도 모든 시련 뒤에 창조적 회복이 이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이 역경 후 성숙하고 창조적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고난 때문이 아니라 시련 앞에서 적극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즉 올바르게 싸웠으며 도덕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장은 바로 고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은 비를 맞아도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는 땅이 있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땅이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온갖 역경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성장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생의 누군가 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의사이자 작가인 폴 투르니에(1898∼1986)는 저서 ‘고통보다 깊은’에서 상실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내 운명을 바꾸고 고아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해방해 준 것은 나를 입양한 가정과 그리스어 선생님, 그리고 내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 무엇보다도 옥스퍼드 그룹 친구들의 진정하고 인격적인 사랑이었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많은 사람들을 쓰시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셨다.”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땐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복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누군가 한 사람이 돼 주어야 한다. 현실요법의 창시자 윌리엄 글라서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가치를 존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을 키퍼슨(Key person·핵심인물)이라고 명명했다. 안타깝게도 종종 뉴스에서 대학에 낙방해서, 왕따 때문에, 사업이 망해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너는 가치가 있으며 너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붙잡아주는 단 한 명의 키퍼슨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사랑과 가치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이다. 이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키퍼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지현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