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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뉴요커’의 깐깐한 교열자 ‘콤마퀸’ 이야기

입력 2018-05-18 05:10:01
‘뉴요커’ 원고를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오케이어’ 메리 노리스. 노리스는 ‘뉴욕은 교열 중’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곁들여 좋은 글쓰기와 섬세한 독서를 위해 숙달해야 할 기술을 톺아본다. 마음산책 제공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연재하고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던 맬컴 글래드웰이 전속작가로 일했던 잡지. ‘호밀밭의 파수꾼’의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미국의 목가’의 필립 로스, ‘축복받은 집’의 줌파 라히리 등 세련된 문인들이 반드시 필자로 거쳐가는 ‘뉴요커’.

‘뉴욕은 교열 중’은 1925년 창간된 이 잡지에서 40년간 교열자로 일한 메리 노리스(66)가 쓴 책이다. 엄정한 교열 규칙을 건조하게 소개할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재치와 유머로 자신의 교열 경험과 철학을 근사하게 풀어놓고 있다. 노리스의 공식 직책은 오케이어(OK’er), 별칭은 콤마퀸(comma queen)이다.

오케이어는 ‘뉴요커’에만 있는 자리로 마지막까지 원고를 책임진다. 잡지가 인쇄되기 직전까지 편집자와 작가 팩트체커 보조교정자와 함께 글을 손질하는 역할을 한다. 노리스는 자기 일에 대해 “전인적(全人的)이라서 좋다. 어법과 문학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갖가지 경험도 소용된다”고 했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글에 대한 노리스의 열정과 호기심에 감탄하게 된다. 허먼 멜빌의 작품 ‘모비딕(Moby-Dick)’을 좋아했던 노리스는 이 소설 제목에 있는 하이픈(-)을 누가 왜 넣었는지 탐구한다. 멜빌의 작업실과 전기 등을 수년간 탐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교열자가 당시의 제목 관습에 따라 하이픈을 넣었다”는 것이었다.

노리스가 진정한 콤마퀸이라는 걸 보여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오자나 군더더기를 찾아내기 힘든 최고의 문장가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읽을 때다. 설터의 ‘가벼운 나날’ 중 ‘방 저쪽에 서 있는 이브의 얇은, 버긴디 드레스는…’란 문장의 쉼표(콤마)가 불필요해 보였다. 결국 노리스는 설터에게 편지를 썼고 답장을 받는다. 설터는 ‘그 콤마는 드레스 속 배의 윤곽선을 강조하고 싶어서 썼어요. 교열자가 없애려 했던 것을 제가 남겼을 것’이라고 한다. 노리스는 이렇게 구두점 하나도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다고 노리스가 글을 재단하는 냉혹한 교열자였던 것은 아니다. 교정 표시를 해두곤 혹시 잘못된 건 아닌지 가슴을 두근거리기도 하고 ‘이렇게 좋은 글을 감상하면서 월급 받아도 되나’ 하고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탁월한 교정 실력 덕분에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가’로 불리는 필립 로스에게 청혼(?)을 받기도 했다.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가 연재될 때였다. 불일치하는 인용구를 수정해 넘겼더니 로스가 편집자에게 “메리 노리스, 이 여성분은 누구죠? 이분이 저와 같이 살 생각은 없을까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노리스는 “만약 그가 이 책을 읽는다면 난 지금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고 싶다”며 위트를 자랑한다.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뉴요커의 탁월한 문화도 책 곳곳에 배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 입사 초기 노리스가 꽃(flower)을 밀가루(flour)로 바로 잡았을 때 편집자가 그에게 이런 메모를 보낸다. “고맙습니다. 작가도, 엘리너 굴드(당시 뉴요커 대표 교정자이자 문법학자)도, 교정자도, 팩트체커도 고마워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해도 하지 못한 일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소 까다롭게 느껴지는 몇몇 영문법 설명만 감내한다면 유명 작가들과 함께하는 ‘뉴요커’의 엄격한 편집 공정을 간접 체험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 뿜어내는 열정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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