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콤플렉스(Red Complex)’란 말이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돼 진보적 사상 전체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극단적 반공주의.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 선풍, 군사독재가 횡행했던 1987년 6월 이전까지의 한국 정치가 이에 해당된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빨갱이’ 가면을 씌웠다. 군사정권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용해 반대세력을 제압했다.
레드콤플렉스는 정치영역만이 아니라 서민들의 안방에서 벌어지던 일상사이기도 했다. 운동권 대학생이 된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왜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고 있느냐”고 혼쭐을 냈고, 아들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대항했다.
냉전시대가 끝나 전 세계가 그 혜택을 누리던 1990년대 이후에도 한반도만큼은 예외였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동토(凍土) 북한’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레드콤플렉스는 반공주의라기보단 ‘반(反)북한주의’라 부르는 게 맞을지 모른다.
한국이 이랬다면, 북한은 ‘양키콤플렉스’에 허덕여 왔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대규모로 열리거나 미군의 전략 폭격기, 항공모함이 한반도 상공과 해역을 지나가면 북한은 공포에 떨었다. 정권은 물론 주민들마저 “우리를 다 죽일 것”이라 여긴다. 6·25전쟁을 일으켜 남침했다가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전쟁에 적극 개입하면서 북한 전역이 쑥대밭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아픈 과거의 기억이 대물림된 셈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역대 북한 정권이 남한 정부보다 미국 정부와의 협상에 더 적극적이고, 위기 때마다 호전적인 도발 근성을 내보인 것도 모두 양키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하고, 조만간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김정은 정권의 핵무기 폐기 결정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북한체제 인정 시나리오가 가시화하자 남한에선 다시 레드콤플렉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분위기다.
보수진영에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어떤 약속을 한다 해도 북한은 북한일 뿐”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강경보수 야당의 대표는 “이러다 김정은이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의 피폐해진 삶과 인권을 챙긴 적이 없었고, 번번이 비핵화 약속을 하고 돌아서면 또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전력(前歷)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서다.
그런데 다 틀린 말일 수도 있다. 문제투성이인 친구에게 “너는 문제투성이니까 아예 말도 안 할거야”라고 하면, 그 친구는 분노의 칼만 갈게 틀림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그렇게 하다가 지금의 핵 위기를 자초했다.
문제투성이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관심과 설득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고, 지금의 자신을 버리면 훨씬 많은 빛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랍비와 로마 관리들조차 ‘적(敵)’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자신을 고발한 가롯 유다에게조차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
담을 쌓고 동족의 ‘북쪽 진영’이 핵폭탄을 개발하든 말든 우리는 우리의 길만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걸어가야 할 그 길이 다 무너져, 더 걸을 길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 가볍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쓴 ‘헬리콥터’란 시의 한 대목이다.
오랫동안 먹구름만 끼던 남북의 하늘에 비핵화와 남북화해의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다. 풍선처럼 커졌다 터져버리지 않고, 헬리콥터처럼 이륙했다 사뿐히 착륙했으면 좋겠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을 기억해보면 놀랍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신창호 종교기획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