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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진보의 도덕 감각

입력 2018-04-17 05:10:02


자신들은 ‘정의의 세력’ 이라는 진보의 프리즘… 현 정권 코드 인사는 개혁, 전 정권은 ‘나눠먹기’로 봐
국민들은 진보와 보수 중 누가 더 도덕적인지가 아니라 ‘도덕의 저울대’가 공정한가를 묻고 있다


김기식 파동은 집권층이 내장한 도덕적 코드를 확인하는 계기였다. 원래 보수와 진보 사이에는 도덕감각의 차이가 있다. 보수의 도덕감각은 측은지심과 책임감이 중심이다. 아담 스미스는 “권력이 있든 없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타자의 처지에 대한 동감과 거기서 비롯되는 책임감을 도덕의 뿌리로 강조했다. 반면에 진보의 도덕감각은 시비지심과 정의감을 앞세운다. 카를 마르크스가 ‘도덕의 비판’이 아니라 ‘비판의 도덕’이 요구된다고 갈파한 바로 그 대목이다. 현실 정치의 복잡한 흐름 속에서 보수와 진보가 뒤섞여 경계가 흐릿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정치에서 이런 구분은 설명력이 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정의의 세력이라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현대사를 이끌어온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두 에너지 가운데 진보는 민주화에 배타적 정통성을 두려 한다. 그 결과 보수는 독재세력의 후예로 규정되고, 진보는 정의의 세력이 된다. 이런 프리즘으로 보면 보수가 범하는 탈도덕적 행동은 ‘불의의 세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고, 진보가 범하는 탈도덕적 행동은 정의의 범주 안에 있는 티끌일 뿐이다. 이런 티끌론의 도덕감각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 김기식 건이다. 이 일은 세 장면이 오버랩되고 있다.

장면 #1: “코드면 어때?”

이 정부 들어서 1년간 우리가 확인한 것은 확실한 코드 인사다. 강력한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이 쓰고 싶은 사람을 쓰는 것이 그 자체로 흠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정도다. 선거 캠프 출신, 참여연대 출신, 전대협 출신이 아니면 이 정부 정무직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남을까. 전 정부의 코드 인사에 대해서는 자리 나눠먹기 회전문 인사라 엄하게 비판했던 이들이 자신의 코드 인사는 ‘개혁’이란 말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진실은 보수 정실 인사에서 운동권 연고주의로 바뀌었을 뿐이다. 공영방송이나 공공기관으로 확산된 코드와 낙하산 인사의 ‘적폐’는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김기식 낙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이 하면 코드 인사고, 내가 하면 개혁 인사라는 도식 뒤에 도덕적 우월감이 아른거린다.

장면 #2: “그래도 니들보다는 낫다!”

눈길을 끄는 것은 검증 과정에서 이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대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본인이 한 푼도 받지 않았음에도 뇌물죄로 인정된 것은 ‘묵시적 청탁에 대한 대가성’이었다. 피감기관이 현안을 챙기고 예산을 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외유를 보냈다면 똑같이 ‘묵시적 청탁에 의한 뇌물 공여’ 아닌가. 한 술 더 떠 청와대는 국회의원들 외유를 전수 조사하면서 ‘평균적 도덕성’을 거론했다. 음주 운전해 걸린 사람이 음주 운전하고 안 걸린 다른 사람들을 들먹이며 왜 나만 처벌하느냐고 주장하는 꼴이다. 이른바 ‘불법의 평등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인식에도 ‘니들이 더 나쁜 사람들인 주제에 왜 이 정도 갖고 난리냐?’는 도덕적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 선관위에 대한 질의도 이를 확인받기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 국회 경험에서 보면 외유의 성격이나 내용, 정치자금 뒤처리 등이 모두 과거의 적폐였고, 국회에서 해서는 안 될 일로 알려진 사안들이다. 당연히 발각되었다면 국회윤리위 제소에 중징계감이다.

장면#3: “적폐 세력 음모라니까”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하나 더 추가된다. 이 건을 금융개혁을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의 음모로 치부하는 것이다. 청와대 청원부터 민주당의 공식 논평까지 이 음모론은 ‘김기식 일병 구하기’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음모론은 익숙한 담론이다. 천안함도 미투도 음모론의 공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음모론의 전략적 목표는 분명하다. 불량식품보다는 고발한 사람의 행실을 문제 삼는 초점 흐리기, 나아가 불량식품을 만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덮어씌우기. 음모론의 배경에도 진보가 한 일은 얼룩이 있더라도 목적이 정의로우니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심리가 깔려 있지는 않은가.

모든 정권의 불행은 오만에서 시작된다. 정치적 오만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인식에서 싹튼다. 김기식 건에서 국민들이 묻고 있는 것은 도덕의 저울대 위에 진보와 보수 중 누가 더 무게가 나가는가가 아니다. 그 저울대가 과연 공정한가이다. 이 공정함이야말로 촛불정신의 핵심 아닌가? 마침 댓글 공작 문제까지 터졌다. 이 수사도 과연 적폐청산 수사처럼 치열하게 할 수 있는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그때그때 무게가 달라지는 저울대를 보고 싶지 않은 탓이다. 참깨 주우려다 수박을 밟아 깨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박형준(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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