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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대중은 그의 삶을 보기 시작했다

입력 2018-03-19 05:05:03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재소환되고 있다. 이씨는 1999년부터 2016년 6월까지 여성 연극인 16명을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지훈 기자


대중은 이제 예술의 가치와 창작자 윤리성 결부시켜 인식
훌륭한 작품 생산하더라도 도덕적 모범 없는 삶이라면 미학적 가치 인정 못 받을 것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은 비단 필자뿐이 아닐 것이다. 오늘 맞이한 변화와 충격의 강도가 너무 세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매번 오늘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내일은 그 이상이 기다리고 있다. ‘현실은 변화무쌍하며,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라는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의 글귀가 이처럼 실감나는 시절이 또 없을 듯싶다.

현실이 이렇게 재미가 있을진대 사람들이 굳이 허구의 즐거움을 위해 공연장을 찾겠느냐고 예술가들과 공연 관계자들은 탄식한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급변하는 세상과 맞물려 변화하는 예술가들의 정체성이다.

시인 고은과 연극연출가 오태석 이윤택의 이름과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세상이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들은 이윤택의 시나리오로 제작된 1980년대 실제 일어났던 성폭력 피해사건을 그린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보고 공감 대신 작가의 위선에 대해 분노한다. 고은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부끄러운 일 하지 않았다”며 세상이 곧 잠잠해지길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만큼 고루해진 그의 감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작품의 예술성과 예술가의 도덕적 결함은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며 소심하게 제기되던 일부 주장은 일찌감치 사그라졌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곧 선(善)’이라는 명제는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되었음에도 그 아름다움을 만드는 주체의 윤리적 자격에 대해서 세상은 오랫동안 무심했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 저서의 여성 비하 표현들이 논란이 되었을 때 청와대가 ‘예술하는 사람들은 본래 자유로운 영혼들 아닌가’라며 옹호했던 것이 불과 지난해의 일이다. 예술가들의 일탈을 암묵적으로 눈감아주던 관대함은 그들이 대중과 격리된 존재라는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요구되던 도덕성은 표절과 같은 그들의 창작활동에 국한되거나, 시대에 참여한다 한들 주관적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그쳤다. 실제로 이번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휩쓸린 여러 진보 진영의 예술가들은 바로 이 정치적 올바름에 기대어 자신들의 도덕성을 보장받던 이들이기도 하다.

대중이 예술의 가치를 창작자의 윤리성과 결부시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천상에 쌓아놓은 예술가만의 고결한 아성이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술계에서 일어난 민주화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자신의 저서 ‘기나긴 혁명’에서 문화는 지난 세기 민주주의와 산업의 진보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 영향을 받으며 진화해왔으며 이 심오한 문화혁명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라 설파했다.

예술가는 이제 대중들과 똑같이 땅에 발을 디디고,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감시를 받는 존재가 됐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생산한들 스스로 삶을 통해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예술가는 사회로부터 거부당할 것이고 그의 작품이 지닌 미학적 가치는 영원히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무대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예술가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세상이 왔다. 안됐지만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한층 더 어렵고 고된 과제가 될 것이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사진=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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