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서문교회를 출발해 삼례를 거쳐 익산까지 갔다. 걷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자꾸 앉거나 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릎에 문제는 없지만 이번엔 허리가 아파왔다. 가는 길에 벤치가 보이면 누웠다. 누워서 맑은 하늘과 뭉게구름을 보는 게 꿀맛 같았다. 언젠가 갈 본향 땅, 천국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 130여년 전 이 땅을 밟은 선교사들도 맑은 하늘 뭉게구름을 보며 천국을 소망했을 것이다. 만경강 다리를 건너 삼례에서 점심을 먹었다. 익산으로 가는 길은 농로를 택했다.
근대교육의 아버지, 아펜젤러
군산은 원래 목적지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이자 근대교육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의 흔적을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에 일정을 급하게 변경했다.
육로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19세기 말 전주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초대 선교사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서해안 해로를 이용해 호남 선교의 창구인 군산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군산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은 전남 순천과 더불어 기독교인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전북 군산 내초안길 아펜젤러선교기념관은 2007년 6년 아펜젤러 순직 105주년을 맞아 건립됐다. 원래 이곳은 섬이었다. 하지만 새만금방조제 건립으로 육지로 바뀌면서 내초도동이 됐다.
기념관 옆에는 기념교회와 기독교역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념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가다 침몰한 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예배당 좌석은 200석 규모이며, 방문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아펜젤러의 비망록, 친필 서명이 들어있는 서적과 육필 문서 등이 소장돼 있다.
언더우드와 함께 ‘최초 선교사’로
아펜젤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서더튼에서 태어났다. 1882년 뉴저지주 드루신학교에 진학했으며, 1883년 10월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신학교에서 열린 신학생선교연합회에 학생 대표로 참가해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만났다. 한국 선교가 확정될 무렵인 1884년 12월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그는 엘라 닷지와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과 동시에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 땅을 밟았다. 첫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부활절에 죽음의 장벽들을 산산이 부순 주님, 이 백성들을 속박하는 굴레들을 깨뜨리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로 인도하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조선의 불안정한 사정 때문에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들이 도착하기 4개월 전 조선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국이 불안한 데다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임신한 부인까지 데리고 온 상황이었다. 미국공사관은 아펜젤러 부부가 낯선 땅에서 선교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해 서울 입성을 거절했다. 반면 총각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아무런 제약 없이 서울로 갈 수 있었다. 일본에 잠시 머무르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그해 6월 스크랜턴 박사 가족과 함께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7월 서울에 들어왔다.
배재학당 설립, 교육 사업에 헌신
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885년 8월 2명의 학생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했으며, 1년 뒤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를 개교한다. 1887년 2월 고종은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이 학교의 교훈은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 20:26∼28)는 말씀이었다.
이후 배재학당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근대화 교육으로 한국 근대기 개화 민족운동의 산실이 된다. 민족수난기를 거치면서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등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7년 10월 베델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정동감리교회의 첫 예배인 동시에 한국 감리교회의 첫 열매가 됐다. 정동감리교회는 새문안교회와 함께 한국 개신교회의 어머니교회라 할 수 있다.
‘문자독점’ 타파한 성경보급
아펜젤러는 탁월한 성서번역가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한문을 중시하고 한글은 언문이라 천대했다. 아펜젤러는 한국 민중이 성경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한글성경 번역사업에 집중했다. 선비와 지배층이 문자의 혜택을 독점하면서 일반 백성을 우민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선교사들이 성경으로 문자 독점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언더우드 레이놀즈 스크랜턴 등과 함께 상임성서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를 조직해 성경번역에 집중했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게일 스크랜턴 등과 함께 1895년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1900년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 27권을 모두 번역해 ‘신약젼셔’를 내놓는다.
한글이라는 ‘감추인 보배 그릇’을 발견하고 그 안에 복음이라는 ‘보석’을 담았던 선교사들의 혜안을 생각하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선교사들은 하급계층과 부녀자들을 주 선교 대상으로 삼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한글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이 한글 보급의 물꼬를 튼 것이다.
교회부흥 씨앗 심은 성경번역자
그는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자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상선을 타고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 어청도 인근에서 선박 충돌사고를 당한다. 그는 17년간 교육과 봉사정신으로 한민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4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사실 교육과 한글성경 보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성경의 틀도 아펜젤러가 놓은 것이다. 미국성서공회는 그의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알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성경번역에 바쳤다.”(1903년 미국성서공회 연례보고서)
기념관에는 아펜젤러가 선교여행 때 사용했던 가죽 가방이 있다. 세로 90㎝, 가로 40㎝, 높이 30㎝의 여행용 가방이다. 아펜젤러는 저 빛바랜 가방에 옷가지와 개인용품을 가져왔을 것이다. 아니, 그가 가방에 담아 제물포로 가져온 것은 조선 민중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