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⑤ ‘호남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
입력 2018-08-28 12:01:01
클레멘트 오웬(1867∼1909) 선교사의 무덤 옆에는 ‘호남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배유지·1868∼1925) 선교사의 묘비가 있다. 벨은 미국 켄터키주에서 출생했다. 1891년 켄터키주 루이스빌 센트럴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켄터키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는 윌리엄 레이놀즈, 윌리엄 전킨 등 7명을 1진 선발대로 파송했고, 1895년에는 벨과 오웬 선교사를 2진 선교사로 파송했다. 벨은 27세에 부인 로티 위더스푼(1867∼1901)과 함께 내한했다. 부부는 1896년 5월 서울에서 아들 헨리를 낳았다. 벨 선교사는 이미 조선에 나와 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얼마 동안 한국의 문화 전통 역사 한글을 배웠다.
어린 두 자녀 두고 떠난 선교사 아내
벨은 전남 개척 선교를 위임받고 1896년 11월 나주 지역을 답사했으나 지역 유생과 주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목포로 옮겨 1898년 목포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헌신했다. 그의 활동으로 목포 양동교회 및 목포교회가 세워졌고,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도 설립됐다. 1899년 1월 목포에서 딸 샬럿 벨을 낳았다.
1901년 4월 벨은 목포를 떠나 전북 지방에서 선교여행을 하고 있었다. 당시 아내는 임신 7개월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군산에서 배를 기다리는 중 그는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는 슬픈 전보를 받았다. 아내는 다섯 살짜리 헨리와 두 살 된 샬럿을 품에 안은 채 숨을 거뒀다고 한다.
28세에 낯선 땅 조선에 와서 34세에 눈을 감으며 두 자녀를 이 땅에 두고 가는 어미의 심정은 어땠을까. 로티는 생전에 이런 편지를 남겼다. ‘나는 남편이 선교 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으나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의사인 오웬과 그의 부인이 로티의 임종을 지켰고, 벨은 부인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장례는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치러졌다. 그녀의 시신은 서울 양화진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아내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선교
서울에서 장례식을 마친 벨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아마도 엄마 잃은 두 아이를 데리고 선교지에서 살아갈 일이 캄캄했을 것이다. 목포에서는 벨 부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1903년 교인들이 헌금을 모아 목포에 교회를 세우고 그 이름을 ‘로티 위더스푼 벨 기념관’이라고 했다.
한편 벨은 군산 선교사로 파송된 윌리엄 불(부위렴·1876∼1941) 선교사의 미국 집을 방문했다. 그때 불의 누나인 마거릿 위테커 불(1873∼1919)을 만났다. 벨은 1904년 그녀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아이들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그해 두 번째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벨은 광주로 이사하기까지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904년 오웬, 프레스턴 목사와 함께 광주 양림동으로 왔다. 그해 12월 25일 벨 목사 사택에서 성탄절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이다.
1908년 벨 목사 부인 마거릿은 사택에서 세 명의 여학생을 모아 놓고 여학교를 열었는데 그것이 수피아여고 전신이다. 이어 남학교도 시작하였는데 훗날 숭일학교가 된다.
1910년경에는 교회 10여곳을 설립했다. 벨 부부는 광주기독병원(제중병원) 설립에 산파 역할도 했다. 벨의 두 번째 부인 마거릿은 광주에 온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예배는 큰 방을 나누어 드렸다. 한쪽에선 남자들이, 다른 한쪽에선 여자들이 예배를 드렸다.
1919년 3월 벨 목사는 부인과, 로버트 낙스(1880∼1959) 목사, 폴 사케트 크레인(1889∼1919) 목사 등과 함께 제암리교회 학살현장 진상을 조사한 후 승용차로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벨의 두 번째 부인 마거릿과 크레인 목사가 사망했으며, 두 사람의 유해는 광주양림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두 번씩이나 선교 동역자인 아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낸 벨의 아픔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절망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선교사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지 선교를 위해서는 아내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1921년 세 번째 부인인 줄리아 디저트(1872∼1952)와 결혼한 후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아내마저 잃고 격무로 소천
벨에게는 광주가 그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양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면서 전라도 선교에 헌신했다. 그는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자택에서 향년 57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광주양림선교사묘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Till He Come’(주님 오실 때까지)이라고 쓰여 있다.
30년간 조선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벨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1923년 유언장을 써 놨다. “조선 형제자매들에게 알게 하옵는 것은 부족한 저로 하여금 이 조선에 나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감사하오며 꼭 믿고 바라는 것은 천당에서 저희를 많이 만나 볼 때에 빌립보서 4장 1절 말씀과 같이 그중 더러는 내 즐거움도 되고 나의 면류관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할 때 여러 형제들도 즐거움으로 서로 만나기를 원하나이다.”
벨의 삶은 슬프게 끝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었던 샬럿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훗날 장성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조선 선교사로 온 청년 윌리엄 린튼을 만나 일본에서 결혼했고 린튼가 ‘신앙의 어머니’가 된다. 벨이 조선 땅을 밟은 지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설립된 유진벨재단은 대북 비영리 민간단체로 북한 식량지원과 결핵약, 진단장비 지원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북한지역 70곳에서 치료 혜택을 받은 북한 주민만 25만명에 이른다. 벨의 신앙 정신과 유산이 지금까지도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전 1:25)’는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